01
첫 문장을 쓰고도 지루한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을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던 탓이다.
꿈이 있으면 뭐 해. 그 망할 게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고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는 유난히 보수적이고 무뚝뚝하셨다. 박정수가 처음 연기를 하겠다며 집을 나오던 날, 신발 끈을 묶던 머리 위로 그렇게 말했다. 어리고 철없던 그때에는 보란 듯이 성공해서 어머니가 틀렸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호기롭게 생각했는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오지 않는 연락에 전전긍긍 하고 있는 오디션 발표 날마다 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촉이 날카로운 만년필 끝에서 새어나온 잉크가 종이를 짙게 물들이고 구멍을 만들 동안에도 한 글자도 더 적어내리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런 그를 힐난하기라도 하듯,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삐삐가 느리게 울렸다. 결국 옷을 대충 걸쳐 입고 나와 빌라 복도에 있는 공중전화에 찍혀있는 번호를 눌렀다.
-어, 정수야. 난데.
"오랜만이네요. 선배. 잘 지내셨죠."
-나 이번에 단편 영화 찍는 거 알고 있지?
"아아, 네…."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선배였다. 그의 아버지는 방송계에서 꽤 잘 나가는 PD였는데, 그 재능을 물려받은 탓인지 혹은 그렇게 알아온 인맥 덕분인지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몇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다. 바로 전 작품으로 독립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던 그는 얼마 전에 만났을 때에 새로 크랭크인 들어가는 작품에 대해서도 한참 설명을 했었다. 그때에도 함께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넌지시 비치기는 했지만, 독립 영화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던 박정수는 그저 웃으며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 영화로 얼굴을 알릴 거였으면 진작 적당한 역할을 맡으며 아르바이트를 때려 치웠겠지. 하지만 다시 연락을 해 온 선배에게 아무렇게나 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단편 영화기는 해도 투자도 많이 붙고 배우들도 괜찮아. 너 혹시 생각 있나 싶어서 연락했다.
"챙겨주신 건 감사한데요…."
잠시 말을 골랐다. 이미 한 번 했던 거절을 반복하는 것은 처음 선을 긋는 것보다 어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박정수를 오래 봐 온 선배는 그의 그런 성격을 알고 먼저 말을 이었다.
-너 눈 까다로운 거 알아 인마. 그래도 이건 너랑 정말 잘 어울려서 그래. 놓치면 너도 나도 후회할 것 같아서.
처음 말을 꺼냈을 때에도 그런 식으로 설명을 하기는 했다. 정말 너랑 딱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사실 그때는 워낙 흘려들어서 영화가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좀 궁금하기는 했다. 잠시 고민하며 눈을 굴리던 박정수의 시야에 페인트가 흉하게 떨어져 나간 복도 구석이 보였다. 그 아래로 퀘퀘한 먼지가 뜯긴 살점처럼 쌓여 있었다. 박정수는 전화기 너머로 소리가 넘어가지 않도록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구질구질하게 앉아서 한 문장도 쓰지 못하는 일기나 끌어안고 사는 인생이 나을지, 아니면…….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인 줄도 모른다. 이미 영화제에서 한 번 이름을 알린 선배는 더 많은 배우들과 작업을 할 기회가 생길 것이며, 두 번이나 거절을 한 저 같은 건 금세 잊어버리고 말 것이다. 오랜 친분으로 자신을 챙기고 드는 그마저 저를 잊어버리면, 제게는 정말 몇 번인지 모를 오디션의 낙방만이 남게 될 것이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라면…… 더는 고민하지 않고 잡아야 하는 거 아닐까.
가만히 좁은 단칸방을 생각했다. 쥐가 파먹은 듯 뜯겨져 나간 구석의 낡은 벽지가 궁상맞은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습기가 배어 나온 벽에는 누런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낡아서 완전히 잠기지 않는 싱크대가 뚝뚝 물을 떨어트렸다. 까맣게 잉크가 물든 일기장 같은 풍경들. 가난의 그림자는 이제 정말 지겨웠다.
"일단 시나리오, 다시 볼 수 있을까요."
02
김희철. 알지? 얼마 전에 단편 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 받은 녀석.
아… 그래요? 박정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제 어깨를 감싸고 촬영장 곳곳을 소개시켜주는 선배를 따라다녔다. 사실 아는 이름이기는 했다. 주변의 몇 안 되는 친한 선후배나 동기들이 죄다 그의 이야기를 해서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얼굴은 단번에 주연을 맡을 것 같이 깎아 놓은 것처럼 생겨서는, 얼마 전 개봉한 영화에서 비중 있는 조연급의 역할을 맡아 굉장히 인상적인 연기를 했다고. 그래서 조연으로는 이례적으로 영화제에서 독립스타상까지 받았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촬영장에서 처음 본 얼굴은 스타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반짝임을 머금고 있었다. 누구라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마음을 끄는 얼굴이었다. 타고난 외모마저 재능으로 여겨지는 바닥에서 그는 단지 그 자체로도 별 같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최우수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었던 감독과, 독립스타상을 받은 신예 배우. 두 사람과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것은 박정수에게 굉장한 기회임이 분명했다. 그에 비해 박정수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배우 지망생이었으니까. 사실 '스타 지망생'이라고 해야 좀 더 맞을 것 같기는 하다. 박정수는 연기를 하고 글도 쓰고 싶었지만, 정확하게는 그걸 통해서 성공하고 싶었다. 돈과 명예. 배우로서든 작가로서든 성공하면 뒤따라올 그런 것들에 목이 말라 있었다. 사실 아주아주 최초의 순간에는 그냥 단순히 연기가 즐거웠을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가난과 현실에 찌든 청춘에게 꿈을 통한 자아실현은 사치였다. 차라리 선명한 결과물이 필요했다. 실패작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또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물이. 그래서 더 자주 성공하고 싶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싶었다.
"뭐야, 애송이였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했다.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주 바닥인 수준은 아니라고 믿었다. 천재는 아니어도 범인 수준은 된다고, 그러니까 치열함과 운이 맞아 떨어지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정 감독님이 워낙 끼고 돌아서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했는데… 영 형편없잖아."
"말이 좀 심하신 거 아닌가요."
"심한 건 네 연기겠지."
그러니 이렇게 촬영장 한 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신랄한 비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감독이 아니라 상대 배우로부터.
"억울하면 수준 좀 맞춰 보던가. 여기 시나리오랑 감독, 주연 배우 통틀어서 네 수준이 너무 뒤떨어진다는 생각 안 드냐?"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는 문장들이 뾰족하게 날아와 꽂혔다. 박정수 역시 자신이 내세울 것 하나 없이 자존심만 높은 애송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독이나 선배도 아닌 비슷한 경력의 배우가 수준을 지적하는 것은 분명 무례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김희철이었다. 영화판에 뛰어들자마자 관심을 집중 받고 있는 신예. 흔하지 않은 일이지만 그라면 가능했다. 자존심이 너절하게 짓밟힌 박정수는 진심으로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 얼굴을 쳐다보면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스태프들 역시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다. 촬영장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재능이 없으면 무식하게 노력이라도 하던가. 감이 없으면 대본을 씹어 먹을 만큼 연습을 해와야 할 거 아냐."
그러나 그 말에는 정말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박정수는 차라리 그의 재능이 폄하당하는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의 노력이 무시당하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 왔으니까.
"좀 반반한 낯짝 믿고 너무 대책이 없으시네. 근데 요즘 세상엔 너무 곱상하게 생긴 것도 득 아냐~ 요즘엔 개성 있는 얼굴이 주연 하는 게 대세라서 당신 같이 대충 했다가는 도태되기 십상이라고."
"그쪽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 네가 보기에도 내 얼굴이 좀 잘난 것 같긴 한가 보지. 근데 나는 실력도 되잖아. 누구처럼 껍데기만 반반한 게 아니라."
"이봐요."
"다 가진 나랑, 그나마 그거 말곤 봐줄만한 게 하나도 없는 너랑 같아 보여?"
늘 덤덤하게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둥근 눈에 처음으로 감정이 치솟았다. 만난 지 고작 한 달 정도 밖에 안 된 사람이 뭘 얼마나 안다고 그의 노력의 수준을 확정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빼곡한 메모로 가득한 대본 한 장 한 장도, 고작 대사 한 줄을 마음에 들게 완성하기 위해 밤새 반복하던 시간도 무엇 하나 알지 못하면서. 그가 박정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촬영장에서 보이는 모습이 전부였다. 물론 결과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치가 떨리게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 노력마저 폄하당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힘주어 뜬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걱정해줄 때 정신 차리자. 어?"
김희철은 들고 있던 대본을 바닥에 집어 던지며 차갑게 일갈했다. 끝내 아무 말 하지 못한 박정수의 입술에 억눌린 피가 맺혔다.
03
「검은별」은 두 남자의 복잡한 관계를 담은 이야기다. 해성과 준서는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다. 어릴 때는 제법 가까웠던 두 사람이 모종의 이유로 멀어지게 된다. 준서는 해성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해성은 준서가 악의적으로 자신의 삶을 망쳤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원망하지만, 함께 보냈던 시절의 기억으로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 일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만약을 가정하며 끊임없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함께 했던 시절은 서로의 가장 좋았던 기억이었고, 좋았던 날들마저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진실이 풀리지 않은 채로 감정이 쌓인다. 서로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떠나지 못한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만 미워하지 않는다.
"애증이죠."
김희철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미워하지만 떠날 수 없는 관계, 사랑하지만 함께일 수 없는 관계. 다른 단어가 필요 없는 감정이었다.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박정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며 흘끔 김희철의 눈치를 봤다. 사실 처음부터 시나리오 속 해성과 준서의 감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면 김희철이 또 저번처럼 비수를 꽂아 댈까봐 신경이 쓰인 것이다. 그렇지만 다 아는 척을 하다가 촬영장에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자존심을 접어 두고 솔직하게 말했다.
"제가 이상한 걸 수도 있는데… 싫어하는데 또 동시에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그건 그냥 싫어하는 거 아닌가요?"
"정수야. 내가 너를 꼭 준서로 캐스팅하고 싶었던 데는 이유가 있어."
"네?
"고민됐을 텐데 솔직하게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내가 생각하는 준서야."
그런데 오히려 선배는 그의 대답을 반가워했다. 박정수는 얼떨떨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야. 그렇지만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항상 밉거나 좋거나, 단순하게 선을 그어 나눌 수 있는 건지."
"……."
"네 가족들 사랑하지? 그렇지만 미울 때도 있고."
"그건… 그렇죠."
"완벽하게 좋거나 완벽하게 나쁜 사람은 아무도 없지. 좋은 점이 있는가 하면 나쁜 점도 있기 마련이잖아."
박정수는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옆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감정이었는데 실마리가 조금 보이는 듯했다.
"뭐 전반적인 이해를 해야 하니까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내가 생각하는 준서는 사실 네 말이 더 가까워. 무언가를 미워하면 절대 좋아할 수 없다고 믿지. 실제로 애증하면서도 그 감정에서 애愛의 가능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는 애야.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더더욱 배신감을 느끼고 원망할 이유밖에 되지 않는다고 믿는 거지. 이미 끝난 관계라고 스스로를 단정 지어 버리는 거야."
"……선배가 보는 제가 그래요?"
"가끔은 답답할 정도로 고집 센 녀석이긴 하지."
눈썹이 조금 찌푸려진 얼굴을 보고 선배가 가볍게 웃는다. 네가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그 말을 듣고도 박정수의 얼굴에는 여전히 의아함이 어려 있다.
"그런가 하면 해성이는 준서를 원망하면서도 좋았던 과거의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해. 할 수 있다면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거지. 얽힌 매듭을 풀고 싶어 하지만, 그 이유는 오해를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해서 다시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처럼 돌아가길 바라는 걸 거야."
"…많이 다르네요."
"준서가 증오에 기반한 애증이라면 해성이는 애정에 기반한 애증인 거지. 준서는 자신이 해성을 미워해야 한다고 믿고, 해성이는 준서를 할 수 있는 한 놓지 않고 싶은 거야."
"그럼 준서가 해성이보다 나쁜 사람인 걸까요?"
"전혀 아니지."
"왜요?"
"별들도 제각기 다른 빛깔과 온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잖아. 사람도 똑같아. 100%의 정답은 없어. 그렇게 모두 다른 존재의 이유가 있을 뿐이니까."
가만히 듣다가 김희철을 쳐다봤다. 무어라 끼어들어 트집을 잡을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잠잠하다.
"다만 두 사람이 끝없이 다른 것은 분명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전혀 다른 존재들이 만드는 관계의 이야기거든."
"전혀 다른 존재…."
"오해가 비롯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각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그래서 관계가 어떤 형태로 흘러가게 될지…. 흥미롭지 않니?"
"조금 알 것 같아요."
"나는 그게……. 아니다. 이 얘기는 하지 말아야지."
"왜요, 뭔데요?"
"너희가 오롯이 준서와 해성이 되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느끼게 될 사실이야. 내 손으로 테두리를 미리 정해 놓으면 재미없겠지."
선배의 얼굴에는 제법 진지한 빛과 반짝이는 흥미가 어려 있었다. 꽤 오래 알아온 박정수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만드는 영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 맺힌 얼굴. 운 좋게 가지고 태어난 부모와 배경 덕에 이만큼 왔다고 생각했었는데, 마냥 그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박정수는 조용히 입술을 씹었다. 얼마 전 찢어졌던 자리에 다시 핏망울이 맺히는 위로 붉은 시선이 닿는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는 해성과 준서이고…… 결국은 너네가 어떻게 이해하고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또 달라지겠지. 나는 그걸 기대해. 이야기는 함께 만드는 거니까."
"제가 잘 이해했을지 모르겠어요…."
고개를 돌리면 마주치는 시선.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 무방비하게 눈이 마주치고 말았던 날카로운 감각이 떠올랐다. 시선은 반짝였고 그는 여전히 별이었다. 단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빛이 옮겨 붙을 것 같다. 제각기 다른 빛깔과 온도를 가지고 있는 모두가 별이라는 건 교과서적 모범 답안이었지만 사실 박정수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웠다. 김희철이 별이라면 자신은 그저 빛이 없는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스스로가 못나서가 아니라, 김희철이 너무 빛이 나서. 이런 열등감과 비좁은 마음으로도 괜찮은 걸까…. 박정수는 애써 시선을 피해 다시 선배와 눈을 맞췄다.
"나는 너희를 믿어."
"……."
"두 사람을 선택한 나의 안목도 믿고."
실패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소리가 맑게 퍼져 나갔다.
04
"오늘 연기 좋던데요."
"…감사합니다."
몇 차례 딜레이 되었던 촬영이 겨우 끝난 새벽. 첫 차를 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박정수의 옆으로 익숙한 인영이 다가왔다. 플라스틱 의자에 힘없이 기대앉은 박정수의 옆자리에 앉더니 불쑥 박카스 병을 내민다. 당황해서 받아들고 얼떨떨하게 있자 도로 가져가서 뚜껑까지 열어서 돌려준다. 박정수가 떨떠름하게 쳐다만 보고 있자 날카로운 눈썹이 들썩인다. 왜 마시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박정수는 작게 한숨을 쉬고 박카스 병을 기울였다. 시선은 그제야 만족스럽게 멀어졌다.
"…뭐 할 말 있으세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박정수가 먼저 물었다. 새벽은 고요했다. 사람들을 포함한 모두가 아직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바스락 풀을 밟고 지나가는 산새조차 꿈을 꾸고 있는. 정적은 공기를 더욱 가깝게 했다. 그 시간 속에 단둘이 앉아 있는 것이 영 불편했다. 그러나 김희철은 그렇지 않았는지, 오히려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먼저 가지 않으시고 굳이 여기로 오신 건 용건이 있어서가 아닌가 해서요. 이것도 그렇고…."
박정수가 눈을 깔고 이야기하다가 남은 박카스를 마저 털어 넘긴다. 그러고 보니 새벽이기는 하지만 집에 가면 잠부터 자야 할 텐데… 박카스를 괜히 마셨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뭐지, 피곤한데 잠이 들지 않아서 괴로울 만큼 엿 되어 보라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늦은 퇴근 시간에 카페인 음료를 건네는 것은 그다지 섬세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저 원래 버스 타고 출퇴근 하는데요. 모르셨나 보네."
"아아…."
"가는 길이 비슷하면 같이 갈 수도 있는 거 아닌 가요? 뭐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하나."
"네에 뭐 그렇죠…. 동료사이라면 보통…."
"혹시 아직도 꽁해 있어요? 내가 그때 그쪽 망신준 거 때문에?"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대꾸하던 박정수가 가만히 멈춘다. '꽁해 있냐' 라. 아무튼 이 사람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저 망할 놈의 단어 선택이 무엇보다 최악이었다. 사람의 자존심을 사춘기 소년의 유난한 예민함 정도로 치부해버리다니. 대꾸할 의지가 생기지 않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표현이라고 느꼈다.
"나는 진짜 걱정돼서 한 말이었는데."
"걱정이라구요?"
"응. 진짜로."
걱정……. 박정수는 조소했다. 자신의 무엇을 얼마만큼 걱정하기에 뻔뻔하게도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지. 박정수는 여전히 자신의 재능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만큼은 선명한 확신이 있었다. 선배는 제각기 다른 모두가 별이라고 했지만, 박정수는 여전히 김희철이 별이라면 자신은 그저 빛이 없는 돌덩어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지지 않고 싶은 오기와 의지가 박정수에게는 있었다. 아무렴 어때. 꼭 별이 아니더라도 내 몫이 얼마쯤은 있겠지. 별이 아니어도 우주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보란 듯이 또렷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생각했다. 빛이 없는 존재에게도 존재의 의의와 목적이 있다는 것을. 당신이 별이라고 해서 다른 존재를 경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오기 덕분인지 박정수의 연기는 갈수록 나아졌다. 침묵이 머물던 촬영장에 오케이 소리가 지나고 나면 스태프들이 나지막이 감탄하는 소리가 스쳐가기도 했고, 선배의 칭찬도 잦아졌다. 박정수도 자신감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었다.
"차라리 동정했다고 말씀하시죠. 그냥 솔직하게."
"내가 그쪽을 왜 동정해요? 당신의 뭘 안다고."
"그럼 도대체 저의 뭘 안다고 걱정을 하신다는 건데요?"
말끝이 조금씩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그래도 김희철과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촬영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만날 수밖에 없는 사이이고,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할 상대 배우였다. 괜한 감정으로 몰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이 되었다는 말도, 오늘 연기가 좋았다는 말도 모두 진심이에요. 보아하니 그것도 안 믿는 것 같아서."
"……."
"아니라고 안 하네요. 진짜 융통성 없다."
뭐… 차라리 빈말 하는 것보다 덜 재수 없네. 김희철이 버스정류장 벤치에 길게 기대앉으며 박정수의 얼굴을 빤히 눈에 담는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가 삐걱거렸다. 박정수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툭 툭 발끝을 아무렇게나 움직일 때마다 옅게 흙먼지가 일었다. 새벽이 먼지처럼 흘러갔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서 왜 그동안 안 했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그쪽 생각보다 재능 있다고요. 써먹을 줄을 몰라서 그렇지."
박정수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싸잡아 짓밟아 놓고는 이제는 또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런 수모를 당해놓고 이제와 칭찬을 듣는다고 해서 기쁠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김희철의 말이 진심일 것 같지도 않았고.
"무식하게 직진만 하지 말고 요령 좀 부려 보라는 말이에요. 가끔은 정도보다 곁길이 나을 때도 있는 거니까."
"그게 도대체 무슨…."
그러나 김희철은 퍽 짙은 눈으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눈은 어떤 감정의 이름을 붙여도 어울릴 것 같은 빛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시선의 초점 위에 놓인 박정수는 이제 조금 헷갈릴 정도였다. 이 사람이 나에게 품은 것이 호감인지 악감인지.
"나를 사랑해보는 거 어때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 잘생긴 얼굴로 피식 웃더니 바로 덧붙인다.
"아, 오해 하진 말고. 영화 촬영하는 동안 말하는 거니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박정수가 뚱하니 미간을 찌푸린다. 길게 이어진 촬영으로 쌓인 피로가 채 풀리기 전인 새벽이 노곤했다. 피곤한 상대와 마주 앉아 고단한 대화나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박정수에도 아랑곳 않고, 김희철은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흠칫한 박정수가 몸을 물리려고 했으나 투명한 버스정류장 부스가 등 뒤에 막혔다. 김희철이 피식 웃으며 앞머리 언저리에 붙어있던 나뭇잎을 떼어낸다. 촬영이 이어지는 내내 불편했던 감정은 박정수 혼자만의 것이었는지, 새벽의 빛처럼 와닿는 시선이 달다. 맑고 선명하다. 김희철은 얼어붙은 듯 경계하는 박정수를 보고 가볍게 웃으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시선을 기울였다.
"어쨌든 해성과 준서는 애증이잖아요.”
박정수는 조금 헷갈렸다.
“오늘처럼 증오하는 장면이야 내가 쪼아댔던 때의 감정으로 이입할 수 있겠지만, 그 이면의 애정은 어떻게 표현할 건데요."
내가, 이 사람에게 품은 것이 호감인지 악감인지. 새벽처럼 선선하게 와닿는 김희철의 시선은 그런 힘이 있었다. 청량하고 보드라운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감각을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무 끝에 매달려 있던 새벽 이슬이 툭 신발 코 앞으로 떨어져 흙을 적신다. 버석하게 말라 있던 땅 위로 동그랗게 새벽이 물들었다. 그 작은 점에서부터 여름이 수채화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온통 푸르렀다. 공기도, 음성도. 나란히 놓인 얼굴까지도. 박정수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게 흘러가는 장면을 멍하니 눈에 담았다.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눈을 똑바로 뜨고 분명하게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그저 멍하니 그 곳에 놓여, 느리게 재생되는 장면을 맞이했다. 김희철이 다시 웃는다.
"나를 사랑해 봐요. 나를 미워했던 것처럼."
05
난데없는 말에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엔진 소음이 가까워졌다. 촬영장 정리를 마무리하고 집에 가려던 정 감독이었다. 박정수는 어색할 만큼 와닿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고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뭣들 하고 있어?
-아 선배….
-버스 기다려? 태워다 줄까?
아직 첫 차 오려면 좀 기다려야 하지 않나…. 선배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김희철이 옆에서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렀다. 태워다 주시면 저희야 편하고 좋죠. 거절하려던 박정수는 갑작스럽게 어깨에 놓인 팔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촬영용 소품들이 많아서 좁긴 할 텐데…. 그래도 버스 기다리는 것보단 낫겠지? 대충 뒤로 밀어놓고 자리 만들어서 앉아.
-와…. 감독님 정리에 진짜 소질 없으시구나. 이거 좀 심하지 않아요?
-우리 주연 배우님이 걸어가고 싶으시구나?
-에이, 뭘 또 그렇게 정 없게 말하시나.
김희철이 박정수의 등에 둥글게 손바닥을 얹어 먼저 밀어 넣고서 본인도 차에 몸을 구겨 넣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좁은 차 안에 앉아 도시로 돌아왔다. 차가 작은 편인데다 촬영을 위해 쌓여있는 물건들도 많아서 공간이 협소했다. 버스 정류장에서보다도 가깝게 기대앉을 수밖에 없었다. 포장되지 않은 길 위에서 차가 덜커덩거릴 때마다 맞닿은 어깨가 쓸렸다. 박정수는 자주 어깨를 웅크렸고 김희철은 종종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나 딱히 거리가 멀어지거나 좁혀지지는 않았다. 차 안에서는 선배가 틀어 놓은 비틀즈 노래가 나왔다. Here comes the sun…… I feel that ice is slowly melting. 가사는 잘 몰라도 그 순간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공간을 부유하는 먼지마저 어설픈 청춘 영화의 낭만을 닮은 별 조각처럼 보였다. 잔잔하게 퍼지는 멜로디. 적당하게 권태로운 온도의 공기와, 서로의 숨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흘러가는 가까운 거리. 나른함인지 긴장감인지 모를 공기가 서서히 밀도를 높였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볕이 은은하게 흘러들어왔다. 뺨이 노곤하게 익었다.
-연락처, 알려 줘야죠.
먼저 도착해 내리려는 박정수의 손목이 붙잡혔다. 피곤한 낯으로 선배에게 인사를 하던 박정수가 돌아본다. 눈앞에는 흰 손바닥이 성큼 가까워져 있었다. 그만큼 황당한 말과 함께.
-…왜요?
-사랑하려면 그 대상을 알아야 하니까. 일단 우리 좀 친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야? 선배가 묻는다. 호기심이 역력하게 떠오른 음성이었다. 당황한 박정수가 별 거 아니라고 둘러대는 것보다 김희철이 더 당황스러운 말을 덧붙이는 게 빨랐다.
-박정수 씨가 저를 사랑하기로 했거든요.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뭐. 감독님이 아마추어도 아니고 이렇게 말하면 다 알아들으실 텐데.
-아는 만큼만 사랑하면 되잖아요. 별로… 그쪽의 모든 걸 안다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박정수도 포기한 듯 뚱하니 답한다. 무감한 눈으로 멀뚱멀뚱 잡힌 손목을 내려다본다.
-하하, 그것도 맞는 말이네.
-감독님은 도대체 누구 편이에요.
-누구 편 들어야 하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우리 영화 편이지. 영화에 좋은 일이 나한테도 좋은 거야.
-재수 없어…. 아무튼 일 중독자들은 나랑 안 맞다니까.
-근데 희철이는 그런 타입 아니지 않아?
-…뭐가요?
-아, 정수는 이번에 처음 봐서 잘 모르나. 희철이가 메소드 연기 안 좋아하는 걸로 좀 유명했거든.
선배는 몇 마디 설명을 더했다. 독립영화제에서 상을 받기 전 작품에서 함께 했던 감독은 메소드를 추구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김희철의 역할은 작지만 여자 주인공과 부딪히는 씬이 있는 배역이었다. 김희철은 주연 배우와 다투다가 약간의 몸싸움을 해야 했다. 대본에는 가벼운 실랑이 정도로 적혀 있었고 김희철도 그렇게 합을 맞추었다. 그런데 감독은 촬영이 시작하기 직전에 다가와 연기 도중에 주연 배우의 뺨을 때리라고 했다. 김희철이 이해하지 못하고 대본의 내용을 되묻자 그렇게 찍어야 생생한 반응이 나와서 영상이 잘 뽑힌다고 말했다. 김희철은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감독은 처음에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다들 그렇게 해. 희철 씨한테 맞으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뭘 예민하게 굴어? 신인이라 몰라서 그러는 구나.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얼굴에 더 화가 났던 것 같다. 커진 음성에 촬영장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모였다. 감독은 그게 수치스러웠는지, 네 자리 채울 정도의 배우들은 널리고 널렸다며 그런 식이면 관두라고 말했다. 김희철은 그 앞에서 웃으며 대본을 찢어 버렸다.
-씨발, 수준 낮아서 못 해먹겠네.
-뭐?
-무책임하게 인형 놀이나 하는 게 감독인가? 자신 없으면 그쪽이야말로 관둬요.
그게 무려 김희철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그래서 김희철은 연기로 알려지기 전에 신인 같지 않은 성격과 돌발 행동으로 이미 유명했다. 그렇게 소문이 나면 업계에서 꺼려서 밥줄이 끊길 법도 한데, 오히려 김희철은 다음 작품에서 눈에 띄는 연기를 남기고 상까지 받았다.
-첫 촬영부터 그렇게 개판을 쳤는데 연기는 곧잘 하는데다 저 얼굴에 저 분위기는 대체할 사람이 없는 거지.
-아니 감독님, 칭찬이에요 욕이에요?
-당연히 칭찬이지. 그 선배 촬영 방식에 문제 제기 하는 사람들 많았어. 이 바닥이 다 연줄로 촘촘히 얽혀 있다 보니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 힘들고, 뭐라고 해봤자 들어먹질 않아서 그랬지.
-…….
-그런데 갓 데뷔한 김희철이가 그걸 수면 위로 끌어올린 데다 상까지 받고 승승장구하면서 그 인간 밥줄을 끊어 놨으니… 다들 신인 하나가 큰일 했다며 칭찬이라니까.
김희철은 쓸데없는 말들이라며 얼굴을 찌푸렸다. 박정수는 여전히 손목이 붙잡힌 채로 눈을 깜박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는 선배의 말대로 김희철이라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은 왜……. 그렇게 의아함을 담아 돌아보는 눈이 마주치니 답지 않을 만큼 어색하게 피한다.
-영화에 좋은 게 감독님한테도 좋은 거라면서요? 협조 좀 하세요.
-연애는 둘이서 하는 건데 내가 협조할 일이 뭐가 있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선배까지 그러실 거예요?
-내가 뭐얼.
-그래서, 번호는 주고 가야죠?
메소드가 싫다고, 연기는 연기로 해야 실력인 거 아니겠냐며 무려 첫 촬영부터 감독과 다툼을 한 남자가 그의 지난날들과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그의 의도가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다가오는 김희철이 불쑥 불어오는 여름 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갑지 않게 열이 올랐다. 아직은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박정수는 그가 의아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잡힌 손과 머쓱하게 멀어지는 시선에 연락처를 남겨 주고 말았다.
영화는 긴 다툼 같았다. 극 중 인물들의 관계가 뒤틀려 꼬인 탓에 갈등하고 대립하는 장면이 반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선배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애증이라고 했지만 박정수는 아직 김희철을 애정의 측면에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물론 준서가 해성을 바라보는 시선인 것이지만… 그것 역시 박정수의 눈으로 김희철의 얼굴을 바라봐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김희철은 메소드가 싫다고 했지만 박정수는 극 중 인물과 자신을 완벽하게 분리하는 것이 어려웠다.
「정신 차려 답답한 새끼야!!」
그러나 김희철은 이미 그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준서를 바라보는 해성의 시선은 분명 박정수를 바라보는 김희철의 눈과 달랐다. 그게 신기했다. 박정수는 여전히 김희철이 불편했지만 어느 순간 그의 연기에는 미약한 감탄을 하게 됐다.
「나 좀 살려주라….」
「나를 놓으면 되잖아. 네 손으로 네 목을 조르고 있으면서 내 탓 하지 마.」
「잔인하게도 말한다. 이게 나 혼자만의 문제야? 우리 일이잖아.」
「우리…….」
박정수가 자조했다. 미소를 닮은 서늘한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다툼 밖에 남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에 우리라는 이름이 우스웠다. 그건 준서의 감정이라기보단 박정수의 생각이었다. 대본의 지문에는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저으라는 말만 있었다. 그러나 감독은 연기를 끊지 않고 스태프들에게 계속 이어가자는 손짓을 했다. 차갑게 가라앉아 오히려 냉정해 보이는 얼굴이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아마도 김희철이 아니라 해성일 그는 누구보다도 처연하고 서글픈 얼굴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수는, 준서는, 아니 정수는 그가 좀 우스웠던 것 같다.
「그런 거 10년 전에 다 뒈진 거 아니었나.」
두 사람의 머리 위로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하얗게 젖어 있었다. 젖은 옷과 머리가 유쾌하지 않은 감각을 만들었다. 빗줄기가 내려치는 온몸이 시리고 아팠다. 빗속의 다툼은 서로를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아직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거야? 네 손으로 망가뜨려 놓고?」
「박준서.」
「내 이름 부르지 마. 좆 같으니까.」
「…….」
「지금 이렇게 네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끔찍해. 사실 너도 알지? 그래서 나를 더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억지 부리지 마. 너는 아직도 내가 일부러 모든 걸 망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 이해해.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진실을 외면하진 말아야지.」
「진실? 내가 보고 들어온 게 가장 분명한 진실이야.」
「그럼 내가 왜 이렇게까지 관계를 돌이키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너?」
정수가, 준서가, 아니 정수가 비에 젖어 떨리는 몸을 스스로 감싸 안으며 물었다.
「네가 소중하니까.」
「…….」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니까. 여전히.」
처연한 빛으로 빗속에 잠긴 시선이 마주친다. 분하지만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눈을 보는 순간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이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서. 김희철은 분명 김희철이 아닌 해성의 눈을 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닿는 것은 박정수인지 준서인지 알 수가 없어 헷갈렸다. 호감도 악감도, 그런 단순한 표현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마음들이 마주한 시선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결국 박정수는 먹먹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나를 사랑해 봐요. 나를 미워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저 사람은 지금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까.
06
산 속이라 주파수가 말끔하게 잡히지 않는 라디오가 지지직 소음을 흘렸다. 습윤한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주위로 여름이 지나갔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촬영 탓에 마주하게 된 새벽 공기가 서늘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버거운 무더위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맑고 선선한 공기가.
제 몫의 촬영을 마친 박정수는 간의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잠깐 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촬영을 위해 피워둔 모닥불이 발치에서 존재를 태우고 있었다. 한여름에 웬 모닥불인가 싶었지만 공기가 습하기도 하고, 새벽이라 서늘하기도 하고, 조금 외롭기도 한 탓에 노랗고 붉은 빛이 괜히 반갑게 느껴졌다.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모닥불이 습기를 조금 가시게 했다. 간의 의자 아래에는 희나리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박정수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소음 섞인 라디오를 들었다.
—요즘 날씨가 무척 덥죠? 이럴 때는 비 소식이 반가울 수도 있겠는데요.
DJ인지 기상 캐스터인지 모를 남자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흘렀다.
—한랭전선과 온난전선이 만나 긴 장마가 조만간 시작될 거라고 합니다. 다들 대비 단단히 하시고요. 갑작스러운 비에도 큰 피해가 없길 바라겠습니다.
김희철은 불쑥 불어온 여름 바람을 타고 온 장마 같았다. 맞지 않는 기상예보처럼 예상보다 빠르게 닥쳐 온 장마. 아무 것도 준비하지 못한 박정수는 속수무책으로 빗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굵은 빗줄기가 아프게도 쏟아졌다. 빗속에서 마주했던 먹먹한 시선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 너를 사랑한다는 말. 또 나를 사랑해보라는 말. 두 개의 장면이 디졸브되었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희철과 해성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보는 박정수의 시선은 자꾸 겹쳐졌다. 영화에 너무 몰입한 탓일까. 박정수는 요즘 헷갈리곤 했다. 그가 김희철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정말로 악감이 맞는지. 사실 호감이었던 건 아닌지. 빗속에서는 사고가 흐려졌다.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지 사실 착각을 하고 싶은 건 아닌지조차 헷갈렸다. 그의 삶을 지탱해온 냉정과 이성 너머에서 피어난 불편한 설렘이 장마처럼 정체전선을 형성했다. 달갑지 않게 열이 올랐다.
공기는 어디에서부터 무겁게 이어져 온 걸까. 박정수는 문득 그날을 생각했다. 당신의 연기가 꽤 괜찮았다며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하던 얼굴과, 나를 사랑해보라고 말하던 가벼운 목소리. 흰 손은 떨어진 나뭇잎과 함께 멀어진 지 오래인데도 코끝에 남은 은은한 향기가 여전했다. 김희철에게서는 깨끗한 공기와 가벼운 풀 냄새가 났다. 여름 비를 닮은 존재감과 모순되게도 맑은 날의 상쾌한 감각이 코끝에 맴돌았다. 어쩌면 숲이 가득한 곳에서 촬영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밴 냄새인지도 모른다. 박정수에게서도 같은 향이 나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정수에게 그 향기는 김희철로 기억되었다. 수채화처럼 맑게 번지는 여름을 닮았던 모든 순간으로. 곧 여름 그 자체로.
장마가 시작될 듯하였다. 박정수는 몸을 웅크리며 무언가를 대비하기에도 도망가기에도 이미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곁에 피워둔 모닥불로도 유예하지 못할 만큼 진득하고 무거운 응달의 시절이 코앞이었다.
07
"근데 꼭 애증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제가 생각했을 때 준서는 누구도 쉽게 사랑하지 않을 것 같은데."
동그란 안경을 콧등으로 끌어 올리며 박정수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둥근 손가락 끝에서 대본이 팔랑팔랑 넘어갔다. 눈이 많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본을 볼 때는 꼭 안경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처음보다 많이 가까워진 두 사람은 종종 영화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대화는 자주 다툼에 가까운 분위기로 이어지곤 했지만, 그렇게 교류한 생각들은 역할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좋아질수록 대본대로만 연기하던 박정수가 즉석 연기를 할 때도 많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준서 그 자체인 행동이라서 화면을 들여다보는 감독의 눈이 자주 만족스럽게 빛났다.
"대본 제대로 안 봤지. 영화 절반은 찍었구만 이제 와서 또 뭔 소리야. 그러니까 그 쉽지 않은 애정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게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라는 뜻이라고."
"이번에는 제가 맞을 것 같은데요. 해성이는 모르겠지만 준서는 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완벽하게 미워하기에는 찝찝함이 남은 거지."
박정수는 단호했다. 여전히 두 사람이 애증은 아니라는 게 박정수의 생각이었다. 김희철도 선배도 애증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동시에 누구나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도 했으니까. 그냥 박정수가 생각하는 준서는 해성을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하는 연기마다 선배가 칭찬을 했기 때문에 박정수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솔직히 해성이도… 지금의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단 과거에 대한 미련 같은데. 그냥 구 남친 같아요."
"너 지금 내가 구질구질한 구 남친 같다는 거야??"
"다를 건 없지 않나요. 지나가버린 관계 붙잡고 다시 잘 해보자고 말하는 게……. 솔직히 되게 별로잖아요. 그럴 거면 있을 때 잘 했어야지."
"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구질구질하게 미련 떠는 짓이야. 그리고 얘가 너한테 옆에 있는 동안 잘못한 건 또 뭔데? 그거 다 착각과 고집에 사로잡혀서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그런 거잖아. 다시 잘 지내보자고 해줄 때 고마운 줄 알아야지."
"왜 흥분하고 그러세요. 메소드 싫어한다고 하신 분이."
"…야."
"제 해석은 그렇다는 거예요. 저는 제 생각대로 준서를 만들고 김희철 씨는 김희철 씨대로 해성일 만들면 그게 「검은별」이 되는 거라고 선배도 얘기했잖아요."
"그러니까 끝까지 애증은 아니다?"
"제 생각이니까요."
길게 이어진 대화에도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김희철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가 몸을 홱 돌려 감독을 쳐다봤다.
"감독님, 박정수 씨가 애증이 아닌 것 같다는데 저희 그냥 촬영 엎을까요?"
감독은 멀리에서 손뼉을 짝 쳤다. 이래야 내 준서고 해성이지!
08
비록 다툼 같이 이어지는 날들 속에서도 나름대로 잘 지낼 때도 있었다. 두 사람은 종종 촬영장을 세팅하기 위한 대기 시간 동안 간의 의자에 앉아 유치한 농담을 주고받았고, 촬영장에 비치되어 있는 간식을 같이 나눠 먹기도 했다. 방향이 비슷하다는 걸 안 후로는 같이 퇴근하는 날들도 많아졌다. 박정수는 달갑지 않아 했지만 김희철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박정수도 적응하고 말았다. 나란히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함께 버스에 앉아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가끔은 집에 돌아가며 정류장 앞을 지나가는 정 감독의 차에 함께 타기도 했다. 김희철은 종종 박카스를 내밀었고, 박정수는 처음과 달리 거절했다. 집에 가면 자야 되는데, 카페인 주는 거 진짜 센스 없는 거 아세요? 그 다음부터 김희철은 박카스 대신 촬영장에서 가져온 오렌지 주스를 한 병씩 건넸다. 어차피 같은 촬영장에 있다 온 사람들이니 주스가 마시고 싶었다면 박정수가 챙겨 나오면 될 일이었지만, 김희철은 굳이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뚜껑까지 딸깍 열어 건넸다. 딱히 '주스를' 주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아서 박정수도 그건 받았다.
박정수는 잠이 많았다. 혼자 집에 돌아갈 때면 정류장에 앉아 졸다가 기껏 앞에 멈춰선 첫차를 맥없이 놓치곤 했다. 김희철과 함께 집에 가는 날들이 늘어난 후로는 그럴 일이 거의 없어졌다. 옆에 깨워줄 사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편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다 보니 잠이 오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촬영장에서는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곧잘 했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어쩐지 의식이 되었다. 박정수는 그냥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 보다, 나뭇가지 끝에 맺힌 이슬이나 엉성하게 뭉친 거미줄 따위를 쳐다 보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잠시였다.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하며 어색하게 앉아 있던 박정수는 어느새 김희철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졸고 있었다.
"다 잤어요?"
"네?"
"방금 버스 갔는데."
엔진 소음이 들린다는 생각이 들어 부스스 눈을 뜨자 김희철이 물었다. 김희철은 처음 그 곳에서 만났던 날처럼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기대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었다. 기껏 기다린 버스를 놓친 것이 아깝지도 않은지 덤덤한 얼굴로 앞만 보고 앉아서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물었다. 박정수는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있다가 어색하게 몸을 떼어냈다. 그와 가까운 쪽의 어깨가 좀 더 낮게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니 그렇게 잠을 잔지가 한참 된 것 같았다. 어깨에 기대 존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김희철이 그를 깨우지 않고 어깨를 대주고 있었다니 얼굴이 더 화끈거렸다.
"아… 깨우시지."
"정신도 못 차리고 졸던 사람이 말은 잘 하네."
"여기 버스 잘 안 다녀서 한참 기다려야 될 텐데…."
"그러니까."
가벼운 대답에 미안하다고 해야 할지 고맙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입을 다물게 됐다. 머쓱해진 박정수가 괜히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김희철이 어깨를 으쓱였다. 박정수는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어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묻는 게 나을 테니까.
"혼혈이라는 거, 진짜에요?"
김희철의 이름 뒤에는 붙어 있는 소문들이 많았다. 박정수는 대부분의 소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한 가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김희철의 어머니가 외국에서 꽤 활동하던 모델이며, 무척 미인이라는 것. 다른 소문들과는 달리 그건 약간 신빙성 있어 보였다.
"나한테 관심이 좀 생기긴 했나 보네. 소문에 귀도 기울이고."
"…궁금하긴 하잖아요.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혼혈들은 다 예쁘고 잘생겼다던데 그래서 그렇게 생겼나 싶기도 하고…. 내가 부모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진짜 그렇다고 하면 좀 억울하기도 하고…."
괜히 주절주절 변명 같은 말들을 늘어놓다가 고개를 돌리니 눈이 마주쳤다. 김희철이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리고 웃었다. 그의 뒤로 늘어진 나뭇잎에 맺힌 이슬이 그 순간과 잘 어울리게 반짝였다. 박정수는 눈을 깜박였다. 문득 이슬이 반짝인 건지 김희철의 얼굴이 반짝인 건지 헷갈린단 생각이 들었다.
"나 잘생겼어요?"
"본인도 알잖아요. 잘난 거."
그래서 그렇게 재수없게 구는 거면서…. 박정수가 작게 꿍얼거렸다.
"잘생겼다기보단 예쁘다는 말이 더 맞을 것 같긴 하지만…… 뭐 비슷한 거니까요. 보기 좋은 생김새,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
"나 예뻐요?"
"그렇다니까요…… 왜 자꾸 묻는 거예요."
약간 투덜거림이 이어졌다. 잘생기고 예쁘다는 말 지겹도록 들어왔을 사람이 왜 자꾸 새삼스럽게 묻는 거야….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박정수는 자다 깨서 아직 꿈결이 남아 있는 탓인지 평소보다 더 솔직하게 투덜거렸다. 그 얼굴을 빤히 보던 김희철이 피식 웃었다. 가볍게 터지는 웃음소리가 청량한 여름빛으로 번졌다. 박정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웃음이 번진 방향을 돌아 봤다.
"당신도 예뻐요."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분명하게, 이슬이나 나뭇잎 따위가 아니라 김희철의 얼굴이 별처럼 반짝였다.
"보기 좋은 생김새, 사람들이 좋아하는 얼굴. 그거 그쪽도 그런데."
김희철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서 미소 지었다. 그의 주변으로 새벽이 반짝이는 듯했다. 뾰족하게 날을 세울 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가 새삼스럽게 예쁘다 싶었다. 김희철은 반짝이게 웃었다. 본인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런 얼굴로 그런 말을 해봐야……. 박정수는 그냥 고개를 돌리며 감흥 없이 끄덕였다.
"네에… 감사합니다."
"또 안 믿나 보네. 그쵸."
"……."
"왜 안 믿지? 내가 그렇게 신뢰 안 가는 사람인가? 안 믿냐고 물으면 부정도 안 하고 말이야."
"그냥… 남들한테 그런 얘기 안 할 것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죠. 누구한테 칭찬 같은 거 안 할 것 같은 사람이 그런 말해도 별로 진심같이 안 느껴지잖아요. 그냥 빈말 같고."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인 거."
"그냥 보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괜한 말 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더 진심이라는 건 왜 모르지?"
"네?"
"남들한테 그런 말 안 하는 사람인데 당신 연기도 얼굴도 꽤 마음에 든다는 거… 당신한테만 하는 말이니까 더 진짜라구요."
"저 처음 봤을 때부터 연기 못 한다고 그렇게 사람 많은 데서 면박 주고, 준비 안 해온다고 무시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고, 쳐다볼 때마다 눈으로 욕하고…… 또 뭐 있지. 암튼 그러셨잖아요. 들은 것보단 본 게 더 믿을 만하니까요. 저는 그걸 믿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내 말도 진심일 리 없다는 거예요? 둘 다 진심일 수도 있잖아."
"글쎄요, 그러니까 제가 준서를 연기 하는 건가 보죠…."
박정수는 무심하게 대꾸하며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영화 이야기로의 회피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김희철의 칭찬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가오는 김희철의 말이 진심일 만약을 피해 캐릭터 뒤로 숨는 것이었다. 그가 보고 겪은 것만을 믿을 뿐 그 외의 사실은 불신한다는 배역의 이야기로. 박정수에게 향했던 김희철의 진심은 그를 투과하여 형체 없는 캐릭터에게 닿았다. 그 순간 박정수는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했다. 본인이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눈치 빠른 김희철에게는 그 자연스러운 도피가 느껴졌다. 김희철이 탁 웃음을 터뜨렸다.
"와, 진짜 어렵다."
"제가요??"
어리둥절하단 얼굴로 돌아보는 것을 보니 의도하고 한 행동은 아닌 모양이다. 김희철은 고개를 기울이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뚜렷하고 곧게 와 닿는 시선은 가만히 받고 있기엔 눈부신 햇빛 같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내가 요즘 뭘 좀 찾고 있거든요."
"네?"
"도대체 틈이 어디일까."
박정수가 눈을 깜박였다. 김희철이 싱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어느 날의 깨끗하고 가벼운 풀 냄새가 가까워졌다. 박정수는 움찔 했으나 몸을 물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등 뒤는 정류장의 투명한 벽에 막혀 물러날 곳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흰 손가락이 박정수의 살짝 긴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었다. 눈을 찌를 듯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이 사라진 건데 이상하게 눈을 찡긋 감게 됐다.
"티 안 나게 찾아서 슬쩍 들어가고 싶은데 잘 안 보이네. 어렵다."
"……."
"근데 그거 알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승부욕 생기는 거. 내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말이야."
김희철이 웃으며 말하고 기지개를 켰다. 멀리 두 사람이 기다리던 다음 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09
영화는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밤샘 촬영이 며칠째 이어졌다. 스태프들은 잠깐의 틈이 생기면 촬영장 구석에서 웅크리고 눈을 붙였고, 배우들은 피로한 얼굴을 숨기기 위해 더 두꺼운 화장을 해야 했다. 박정수는 분이 짙게 칠해진 얼굴 때문에 화면에 하얗게 떠 보이지 않을까 신경이 쓰여 쉬는 시간에도 모니터 화면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피부가 좋은 편이라 화장이 잘 받기는 하지만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한 얼굴이라 푸석푸석한 느낌은 아무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희철은 여전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박정수가 긴장하고서 모니터를 할 때면 스태프들 사이에 섞여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다. 어차피 찍은 화면을 바꿀 수는 없으니 다음 장면이라도 더 나은 얼굴 상태로 찍혀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화면에 잘 나오기 위해 잠을 보충한다기보다는 그냥 피곤해서 쉬고 싶은 것 같아 보였다. 보여지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화면에 담기는 모습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런데 김희철의 얼굴은 박정수가 보기에도 촬영 초반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뽀얗고 말간 상태였다. 밤은 같이 새웠는데 김희철은 푹 눈을 붙인 사람처럼 반짝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작 예민한 성격 탓에 사람들 사이에서 쉽게 잠을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걸 보면 역시 타고난 배우였다. 이제 김희철의 타고난 부분에 대해서는 일일이 열등감을 느끼지 않기로 한 박정수는 그저 김희철이 눈을 붙이는 동안에도 화면에 얼굴이 좀 더 잘 나올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고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숲의 밤은 고요했다. 보름달이 하늘의 가운데 떠오른 밤의 울창한 숲은 어딘가 신비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의 좁은 틈을 공유하고 선 두 사람은 한 폭의 공간만 남은 세상의 유일한 존재들 같았다. 당연히 여러 대의 카메라와 스태프들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적어도 영화 속 세상의 두 사람에게는 서로 뿐이었다. 박정수는 기도하듯 곧은 자세로 서서 흰 달을 올려다봤고, 김희철은 몇 걸음 뒤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숲의 공기만 흘러갔다. 카메라는 꿈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것 같기도 한 박정수의 얼굴에서 멀어져 밤의 전경을 담았다. 시간의 흐름처럼 느릿하게 다가온 카메라가 다시 김희철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제게로 돌아 서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선 존재의 등을 무한한 애틋함을 담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카메라는 김희철의 시선을 따라 흘러간다. 고작 몇 걸음 떨어져 있을 뿐이지만 손에 닿지 않는 상대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과 모두 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부딪쳐 치열하게 끌어온 공방 때문에 지친 시간들을 숲의 고요에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서로 같은 시간들을 되짚어 보고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은 것들이 결여된 두 사람 사이의 공기와는 다르게 온전하게 가득 찬 달이 머리 위로 새하얗게 부서져 내린다. 한참을 눈앞의 장면만 바라보고 있던 박정수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 얼굴에는, 먹먹하게 흘러내린 눈물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잠깐 쉬었다 가자. 컷 소리와 함께 이어진 감독의 말에 박정수가 젖은 뺨을 문지르며 돌아섰다. 대사 없이 감정을 표현하며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라서 평소보다 더한 집중력을 요했다. 박정수는 스태프에게서 받은 초콜렛을 부스럭 까먹으며 촬영한 화면을 모니터했다. 웬일인지 김희철도 다가와 곁에 섰다. 흘긋 쳐다보고서 다시 재생되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모니터 위에 물방울이 똑 떨어졌다. 박정수가 눈을 깜박이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오나?"
"나무에 맺혀 있던 이슬이겠죠."
"아냐…. 비 같아요. 곧 장마가 시작될 거라고 했거든요."
박정수는 제법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들은 것처럼 정말로 장마가 시작될 모양인지 숲의 공기가 눅눅했다. 예년보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장마가 시작된대도 이상할 것 없는 시기였다.
"비가 오면 촬영도 중단되겠네요. 비 오는 장면을 찍으려고 가짜 비는 뿌려도 진짜로 비가 내릴 때는 촬영할 수가 없으니까."
"장마가 얼마나 길게 이어질까요. 너무 오래 걸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비 오는 날 안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에는 좀 무서워요."
"천둥번개가요?"
"아뇨…. 비 오는 날은 빗소리 때문에 자기 목소리도 잘 안 들리잖아요. 그럴 때면 꼭 세상에서 지워져 버릴 것 같아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삼켜지는 것 같아서 무서워요."
박정수가 초콜렛을 우물거리며 괜히 어깨를 움츠렸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으면 별별 감상이 다 들었다. 어쩌면 여름비를 닮은 사람이 곁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박정수는 김희철에게 익숙해지고 그의 빛에 물들어갈수록 더 자주 비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런 박정수가 늦은 밤의 공기 때문에 추워하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김희철이 자신이 걸치고 있던 셔츠를 어깨 위로 덮어 주었다.
"알 수 없는 일이 무서운 건가."
"모르겠어요.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게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사라지지 않게 내가 붙잡고 있을 게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떠내려가지 않게."
"…김희철 씨가요?"
"영화는 끝까지 찍어야 할 거 아니에요. 박정수 씨가 멀리 떠내려가서 사라지면 나는 누구랑 영화 찍어요?"
"…그게 뭐에요."
"뭐 진짜 홍수라도 나면 맥없이 떠내려가는 건 그쪽이나 나나일 것 같긴 하지만…. 둘이면 좀 낫지 않겠어요?"
이어지는 대화가 어쩐지 간지럽다. 김희철은 가벼운 말투로 괜히 장난스럽게 말을 했지만 박정수는 그게 무척 다정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김희철이 제 어깨에 덮어준 셔츠보다도 더.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요."
네가 두려워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겠다는 말을 자신의 필요를 빌려 전하는 사람이라니. 그러니 나와 함께 있자는 말을 그런 표현으로 전하는 사람. 그 순간 박정수는 처음으로 그가 해성의 역으로 캐스팅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수의 두려움과 나약함은 김희철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문제였음에도 그는 그런 말들을 했고 그건 어쩐지 정말 위로가 되었다.
"어차피 비는 언젠가 멈추잖아요.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든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든 무섭게 휘몰아치는 태풍이든……. 어떻게 시작된 것이든 분명 끝이 있어요."
그러나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사실.
"비가 멈추고 나면 다시 해가 뜨겠죠. 그때까지 같이 버텨 봐요."
지금 박정수에게 가장 알 수 없는 존재는 김희철이었다. 삼켜 버릴 듯 무거운 구름으로 밀려와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는 것 역시.
10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된 날, 느지감치 눈을 뜬 박정수는 삐삐에 가득 쌓여 있는 연락을 보고 잠이 덜 깬 탓인가 싶어 눈을 부볐다.
[ 3312042 ] 심심한데 영화나 보러 가자는 게 하나,
[ 1414 ] 식사나 하자는 메시지가 둘,
[ 2241000045 ] 둘이서 만나자는 말이 셋.
왜 답을 하지 않느냐는 내용의 음성 메시지가 또 둘.
총 여덟 개의 연락이 모두 같은 발신인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박정수는 부은 얼굴로 침대에 앉아 눈을 깜박이다가 옷을 대충 입고 일어섰다.
빌라 복도의 공중전화에는 언제나 사람이 없었다. 박정수는 기다릴 필요 없이 동전을 굴려 넣고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박정수는 일기장을 보며 아직 낯선 몇 자리 번호를 꾹꾹 눌렀다. 언젠가 김희철이 손등에 적어 주었던 집 전화번호가 일기장 구석에 적혀 있었다. 손바닥을 내밀었지만 김희철은 땀이 나면 지워질 지도 모른다며 손을 뒤집어 그 위에 번호를 적어 주었다. 검은 펜이 슥슥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워 움찔거렸다. 김희철은 번호를 절반쯤 적고서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아무렇게나 방치하고 가서 집에서 봤더니 다 번져서 모르겠다고 하지 말고요. 박정수는 괜히 속마음을 읽힌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나머지 숫자가 길게 늘어졌다. 지워지지 말라고 손등에 적기까지 했는데 집에 가서 봤더니 절반 쯤 번져 있었다. 박정수는 그를 닮은 듯한 필체의 몇 자리 숫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일기장 귀퉁이에 옮겨 적었다. 무슨 이유였는지 아직 모르겠다.
신호는 길게 가지 않고 연결됐다.
"왜 자꾸 삐삐를 보내요?"
-박정수 씨가 삐삐 번호만 알려줬으니까요.
집 전화, 메일, 삐삐. 뭐든 좋으니까 아무 거나 알려줘요. 손목을 붙잡은 김희철이 그렇게 말했고 박정수가 알려준 게 삐삐 번호였다. 박정수의 자취방에는 집 전화가 따로 없었고, 메일은 대학 때 만든 것이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사용할 줄을 몰랐다. 물론 집에 컴퓨터가 있지도 않았다.
"…무슨 일로 연락 하셨는데요?"
-용건 적어 보냈잖아요.
"장난치지 말구요."
-진짠데.
"진짜 영화 보러 가자구요?"
-영화 보고 밥도 먹구요.
"……."
-둘이서 만나요.
박정수가 이 공중전화로 연락을 하는 것은 수십 번의 오디션 낙방 결과를 확인할 때와 가끔 정 선배와 같은 지인으로부터 촬영 제의를 받을 때 정도였다. 이렇게 평범한 친구 사이 같은 대화를 하는 것이 낯설었다. 김희철은 분명 일 때문에 만난 사람이었지만, 그 사실을 잊을 것 같은 통화였다. 김희철은 가벼운 말투로 말하며 종종 웃었다. 듣기 좋은 속도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렀다. 그 자리에 서서 그런 대화를 하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박정수의 시선 끝에 언젠가 보았던 낡은 벽이 보였다. 페인트가 떨어지고 퀘퀘한 먼지가 뜯긴 살점처럼 쌓여 있는 그 장면이 그때처럼 흉물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또 뭐 하지. 나이트도 갈까요?
"…술 잘 못 해요."
박정수가 슬리퍼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며 답했다. 김희철은 고개를 갸웃하며 살짝 웃었다. 그럼 다른 건 좋다는 건가? 대답은 무뚝뚝한데 다른 것들엔 싫다는 말을 안 하다가 나이트 얘기에만 술을 잘 못한다는 답을 하니 헷갈렸다.
"나이트 말고… 콜라텍은요?"
약간의 망설임이 묻은 목소리가 묻는다. 김희철은 눈을 깜박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좋다는 거 맞았네.
-와, 박정수 씨 무슨 고등학생이에요? 스물다섯 먹고 콜라텍 가자는 사람 처음 봐. 나 고등학생 때도 콜라텍 안 다녔던 것 같은데.
"…그게 자랑이에요? 싫음 말구요."
조금 놀렸더니 뚱하니 말을 거둔다. 이러다 진짜 삐지겠네. 김희철은 여전히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돈까스, 좋아해요?
'몽상'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경양식 집이었다. 돈까스, 스파게티 같은 요리가 메인이었지만 빙수나 파르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경양식 집은 다른 곳도 많았지만 '몽상'은 클래식함을 유지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DJ가 LP판을 선별하여 틀어주는 음악이 있었고, 가죽이 살짝 벗겨진 메뉴판이 옛스러웠고, 푹신한 천 소파가 기분 좋았다. 몽글몽글 부드러운 식전빵이 바구니에 담겨 매일 바뀌는 오늘의 스프와 함께 나왔다. 본식도 당연히 먹음직스러웠고 식후에는 커피까지 줬다.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두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지만, 주는 것을 먹지 않는 것과 처음부터 주지 않는 것은 달랐다. 어쨌거나 '몽상'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당답게 손님이 바글거렸다. 김희철과 박정수는 묵직한 천 소파에 앉아 돈까스를 썰었다. 장마가 시작된 탓에 눅눅한 공기를 머금고 튀김옷이 금세 숨죽어 있었다. 바삭바삭한 소리가 나야 할 테이블에서는 나이프가 그릇 위를 부딪치는 달그락 소리만 울렸다. 어색하게 자세를 고쳐 앉을 때마다 천 소파에서 누진 냄새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머쓱하게 한 조각을 썰어 입에 넣고 그래도 맛은 괜찮다고, 하던 김희철의 말소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에 섞여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정신없는 상태로 식사를 마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가 식기도 전에 가게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무슨 생각 해요?"
"첫 데이트가 망했을 때 애프터는 어떻게 신청해야 할까 하는 생각?"
장마는 온 세상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각자 우산을 쓰고 추적하게 바짓단이 젖어드는 거리를 걸으며 그런 대화를 했다. 빗줄기가 우산을 세차게 때렸다. 목소리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좀 더 가까이 붙어 서야 했다.
"그래도 다음에 파르페 먹으러 와요. 촬영장에서도 맨날 사탕이랑 초콜렛같이 보기만 해도 달아서 눈살 찌푸려지는 거 까먹고 있던데."
"그렇게 애프터 거는 거예요? 지금은 다 별로고 그냥 집에 가서 잠이나 자고 싶은데…."
"그러니까 대답은 지금 하지 말고요."
"그럼 언제 해요?"
"대답이 예스가 될 것 같을 때?"
김희철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며 말했다. 둘이서 만나요. 영화 보고 밥도 먹구요. 그렇게 말했다. 비록 식사는 좀 망했지만 영화는 나을 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화관에 걸려 있는 작품 중에서는 보고 싶은 게 없어 비디오를 빌려 보기로 했다. 지하에 있는 작은 비디오방이었다. 사람들이 꽤 있는지 두런두런 말소리도 들렸다. 두 사람은 우산을 털고 들어와 영화를 골랐다. 적당한 로맨스 물이었다. 어쩌면 「검은별」과 비슷하게 잔잔한 분위기인 것 같았다. 박정수는 콜라를 쪽 빨아 마시며 영화 화면을 보다가 눈을 굴렸다. 비가 조금 새는지 벽 구석에 누렇게 얼룩이 져 있었다. 어둑한 시야에 색이 바랜 벽지가 들어왔다. 방안에서 켜켜이 쌓인 먼지 냄새가 났다. 몇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을지 모를 낡은 소파이니 어쩌면 당연했다. 비 때문에 유난히 더 짙게 피어오르는 듯 했다. 박정수는 그것을 혐오했다. 좁디좁은 반 지하 단칸방에서 지겹도록 맡은 그 퀘퀘한 냄새가 그에게는 가난의 증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달갑지 않은 생각이 든 박정수가 설핏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왜요?"
옆 자리에는 김희철이 있었다. 제법 집중해서 영화를 보고 있던 김희철이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돌아본다. 박정수는 눈을 깜박이며 코를 킁 훌쩍였다. 김희철에게서는 마른 하늘 같은 냄새가 났다. 푸른 숲처럼 청량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느껴졌다. 딱히 냄새가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바삭한 햇살에 잘 말린 빨래 같은 깨끗한 공기가 그런 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보송하고 상쾌하고, 기분 좋은 향이었다. 신기했다. 그렇게나 소나기처럼 예고 없이 먹먹하게 쏟아지던 남자에게서 바삭한 공기가 느껴진다는 게. 그리고 그게 박정수를 편안하게 만든다는 게.
"…향수 뿌렸어요?"
"아니요? 왜, 무슨 냄새 나요?"
김희철이 자신의 어깨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그러나 딱히 느껴지는 게 없어 고개를 갸웃한다. 박정수는 별다른 설명 대신 간격을 좁혀 앉았다.
"아뇨, 그냥……. 좀 가까이 앉아도 되죠. 옆에 자리가 없어서."
애프터의 대답이 예스가 될 것 같을 때라…… 그런 거라면 지금 대답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11
동그란 물방울이 어깨를 통통 두드렸다. 투명하게 젖은 셔츠가 어깨를 따라 달라붙었다. 촬영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던 중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분이 잔뜩 가라앉았을 텐데, 젖은 머리를 털던 김희철은 마찬가지로 젖어서 당황하고 있는 박정수를 보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젖어서 갈라진 앞머리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버스 정류장 유리에 얼굴을 비춰보는 옆모습이 신기할 정도로 예쁘게 보여서. 그 얼굴에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잠깐 맞아 볼래요?”
“네?”
“어차피 젖어 버렸잖아요. 이만큼 맞든 조금 더 맞든 이대로 버스 타기는 글러 먹은 것 같고. 어린애처럼 앞뒤 잴 것 없이 비를 맞을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굳이 할 필요 없는 일을 기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우산을 괜히 쓰는 게 아닌데….”
“그쪽한테는 좀 필요한 일인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이 아니면 못 한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런 거 하고 싶지 않다구요……. 영 내키지 않아 하던 박정수는 결국 김희철에게 손목을 붙잡혀 빗속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 말솜씨에 홀려 버린 탓인지 조금, 아주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촬영을 위해 오가는 교외에는 운행이 잦지 않은 작은 기차역이 있었다. 하루 두 번 정도 기차가 지나가는 게 전부인 간이역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면 경적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거리에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 눈을 붙이기에 바빠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지만, 사실 꽤 낭만적인 것이었다. 도시의 가장자리에 있는 숲 속 작은 간이역. 보통 청춘 영화의 로맨스는 그런 곳에서 시작되는 법이었으니까. 잠시간 비를 맞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젖어 버린 두 사람은 좁은 기찻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철로를 따라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다가 비틀거리는 박정수의 뒤에서 김희철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씨 웃지 말아요…. 투덜거리며 돌아보니 허리를 꺾으며 웃어대던 김희철이 제 몸을 감당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결국 꽈당 무릎을 찧고 있었다. 불평하려던 박정수도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진짜 바보 같다 우리. 그 말이 뭐가 우습다고 또 한참을 못 견디게 웃어댔다. 정말 쓸모없고 무용하고 한심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그것만이 유의미한 모든 것처럼 느껴졌다. 빗방울이 요정 가루처럼 토도독 튀어 올랐다. 그보다 더 반짝이는 미소가 빗속에서 넘실넘실 떠올랐다. 예뻤다. 눈이 부시도록 화사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전혀 예쁠 리 없는 몰골을 하고서도 웃음이 멈추지 않을 만큼 즐거웠다. 수많은 청춘 영화 속 주인공들도 다 이런 기분이었겠지. 무언가에 홀린 듯, 꿈을 꾸는 기분. 박정수는 스치듯 그 생각을 하는 순간에야 자신이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 봐, 기분 좋지.”
뺨을 스치는 빗줄기는 촬영을 위해 뿌리는 가짜 비보다 덜 아프고 덜 차가웠다. 그 말대로 찝찝하고 아프기보다는 시원했다. 꽉 막혀있던 어딘가가 흘러 내려가는 것처럼 후련했다. Here comes the sun…… I feel that ice is slowly melting. 쏟아지는 빗속에 있는데 이상하게 햇살을 맞는 것처럼 따스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 짧은 낭만 뒤에 덮치는 현실은 훨씬 적나라했다. 쫄딱 젖은 상태로는 버스나 택시를 타기도 곤란했다. 그대로 집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두 사람은 다행히 간이역 근처에 있는 모텔을 발견했다. 간판이 모텔이라고 붙어 있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작은 구멍가게가 딸린 민박집에 가까운, 아무튼 모텔과 민박의 중간쯤 되는 숙박 업소였다.
김희철이 김 서린 욕실에서 나왔을 때 먼저 씻고 나왔던 박정수는 젖은 옷들을 바닥에 넓게 펼쳐 두고 드라이기로 말리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남의 옷을 먼저 말려놓은 것인지 김희철의 옷은 제법 입을 만하게 마른 상태였다. 비 오는 날이라 숙박객이 별로 없는지 조용한 방 안에 흘러드는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완전히 잠기지 않은 샤워기가 물을 떨어트리는 소리, 닫힌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 멀리 비포장도로에서 물 웅덩이를 스치는 바퀴의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낮은 기압을 타고 커다랗게 울려서 괜히 신경을 예민하게 했다. 가운 위에 뒤집어 쓴 이불 사이로 튀어나온 손목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옷을 말렸다. 낡은 드라이기가 탈탈탈 바람을 흘렸다. 뒤늦게 오한이 드는지 웅크린 어깨가 종종 떨렸다. 여름이라 날이 차지는 않았지만, 원래 물놀이 후 아무렇게나 뒹굴다가는 여름 감기에 들기 쉬웠다.
“뭐라도 좀 마셔요. 덜덜 떨고 있지 말고.”
“커피밖에 없어서요.”
“은근 까다로운 사람이라니까.”
드라이기 소음 사이로 어색하게 말을 걸며 침대에 걸터앉던 김희철이 대충 다 마른 속옷을 주워 입고 걸치고 있던 가운을 제대로 고쳐 묶었다. 슬리퍼까지 신고 문 앞에 서니 어리둥절해진 박정수가 드라이기를 끄고 돌아봤다.
“…어디 가요?”
“담배 태우고 올 게요.”
“아직 비 오는 데요?”
“요 앞에 지붕 밑에서 금방 피우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걱정하는 게 아니라……. 혼자 있기 싫은데.”
방 안을 가득 채우던 드라이기 소음이 뚝 끊어진 공기 위로 버석한 음성이 번진다. 마른 낙엽처럼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금방이라도 쏟아질 장마처럼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김희철은 문고리를 잡은 채 멈칫했다. 박정수는 그저 동그랗게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게 울고 있지 않은데도 젖은 눈이었다. 분명 머리까지 바싹 말라 더는 젖어 있지 않은데도 말려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얼굴이 발길을 붙잡았다.
“…금방 올 게요.”
방에서 나온 김희철이 입구 옆에 붙은 구멍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 무심하게 콘돔 상자를 툭 던졌다.
“왜, 이거 필요해요?”
“아이, 아니거든요…….”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당황한 김희철이 콘돔 상자를 카운터 구석으로 멀찍이 밀어 버렸다. 안 그래도 좁은 방 안에 단둘이 있으려니 신경이 예민해져서 위험했는데, 이제는 없던 생각까지 시끄러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게 생겼다. 귓가가 붉어진 김희철이 손을 팔락이며 눈을 굴렸다.
“여기 코코아… 뭐 그런 것도 있습니까?”
무뚝뚝한 얼굴로 콘돔 상자를 도로 정리해 넣던 주인이 김희철의 얼굴을 빠안히 쳐다봤다.
“모텔 와서 그런 거 찾는 이상한 놈은 세상 처음 봤네.”
“…커피 안 마시는 사람 처음 보세요?”
“애인 아냐?”
“아오, 아니라구요…….”
“그럼 친구라고?”
“동료에요, 동료.”
“지랄허네.”
브레이크 없이 튀어나온 욕설에 당황한 김희철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그 역시 입이 꽤 험한 편이었지만, 비를 피하러 들어온 민박집 주인에게 무방비하게 얻어맞을 줄은 몰랐다.
“내가 이 일 하루이틀 하는 줄 아나. 그런 눈깔로 보는 놈들 백이면 백 애인 사이거나, 곧 애인 될 사이거나, 애인이었던 사인데 미련 남아서 후회할 짓 하러 왔거나. 셋 중 하나야.”
“진짜, 아니라니까요…….”
“그냥 동료 코코안지 뭐시기 먹이겠다고 굳이 나오는 놈이 어딨나.”
그 말에, 아니라는 반박이 나오지 않았다. 김희철은 그 말을 듣는 순간에야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넋이 빠진 김희철의 얼굴을 흘긋 돌아본 주인이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서 찬장을 뒤졌다.
“거 있어 보소. 지난번에 아들놈이 카운터 봐주러 왔다가 놓고 간 게 어디 있었던 것 같으니까.”
낡은 문이 열리니 끊겼던 드라이기 소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돌아보는 얼굴이 기다렸다는 듯 쫑긋거렸다. 김희철이 없는 동안 덩그러니 혼자 앉아만 있었으면서 기다리지 않았다는 듯 다시 드라이기를 잡는 얼굴이 빤히 읽혔지만 그냥 두었다. 무뚝뚝했던 주인이 직접 끓여준 코코아가 담긴 종이컵이 박정수의 무릎 옆에 달칵 놓였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에 종이컵과 김희철의 얼굴을 번갈아 봤지만 설명은 없었다. 박정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제 몫인 듯한 종이컵의 온기를 양 손으로 붙잡았다. 왠지 한 뼘 더 어색해졌다.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던 김희철에게서 연기 냄새는 한 움큼도 나지 않았다.
“비가 금방 그칠까요.”
“아직 장마는 아닌 것 같으니까요. 소나기면 해가 지기 전엔 그치지 않을까요.”
“계속 내리면 어떡하죠. 우산도 없는데.”
“하룻밤 자고 가죠 뭐.”
“네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당황한 박정수가 뜨거운 코코아에 혀를 데어 어버버거렸다. 아 뜨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뺨을 잡아 돌린 김희철이 눈물까지 고인 얼굴을 가만 들여다본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혀가 약한 화상 때문에 유난히 붉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요. 선 안 넘어갈게요.”
“이미 많이 넘은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웅얼웅얼 삼켜드는 소리에 픽 웃은 김희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쪽이랑 나랑 그어진 선이 많이 다른가 보네. 별 거 아닌 말투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가만히 뺨이 붙잡혀 있던 박정수가 눈을 굴렸다.
“…더 넘어오려구요?”
“욕심나면.”
유치한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가 모조리 흘러드는 것 같다. 함께 맞은 소나기와 나란히 걷던 기찻길, 간이역 옆 허름한 모텔,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어색한 공기. 김희철은 박정수를 빤히 들여다봤다. 아마 주인 아저씨가 말했던 ‘친구는 무슨 지랄허네’ 하는 눈이 이런 것일 거라고, 스스로 자각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투명하게 와닿는 시선에도 용케 피하지 않았던 박정수가 침을 꼴깍 삼켰다.
“……어떻게 하면 욕심이 나는 데요?”
김희철은 박정수를 삼켜 버릴 듯 빤히 쳐다보다가 멎은 공기를 깨어내듯 피식 웃었다. 대답을 듣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들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12
비포장도로를 운행하는 버스는 필연적으로 소음을 동반했다. 매일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낡은 버스의 덜컥임과 투박한 엔진 소음에 적응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감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서, 버스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박정수의 얼굴은 자주 불편함에 찌푸려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만히 잠들어 있던 얼굴에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 귀여워서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김희철은 어깨와 이어폰 한쪽을 동시에 내어 주었다.
-사실 어릴 땐 꿈이 가수였거든요.
-잘 하는 게 많은 사람들은 꿈도 여러 개구나. 나는 완전 한 우물만 팠거든요.
-보다시피 변덕 심한 성격이잖아요.
한 쪽씩 나눠 꽂은 이어폰에서는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낡은 버스의 덜컥임이야 여전히 어쩔 수 없었지만, 귀 아픈 엔진 소음만큼은 그 덕에 중화되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한 두 사람은 종종 촬영장에서 똑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픽 웃곤 했다.
-근데 내가 노래하는 건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잘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좀 그런 편이잖아요, 뭘 해도 다 그럴 듯하고 처음 해보는 것도 능숙하게 보이는 재수 없는 타입.
-이제 나한테 칭찬도 해주네요.
-재수 없다는 거거든요?
그리고, 잘 하니까 꿈도 꿨겠죠. 박정수는 당연하다는 듯 답하고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내가 그래 보여요?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김희철이 박정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눈이었다. 촬영장에서 해성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였는지, 함께 비를 맞았던 어느 날이었는지는 헷갈렸지만.
-그쪽 마음 얻는 건 좀, 헤매고 있는 것 같아서.
-…그게 뭐야.
-틈으로 몰래 비집고 들어가서 훔쳐 나오려고 했는데, 미로처럼 출구를 못 찾고 갇혀 버린 것 같아.
김희철은 자주 그렇게, 별 거 아닌 말투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 침묵으로 대화를 매듭짓게 되고 마는 말들을.
“아, 깨우시지…. 저 때문에 또.”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내가 욕심 부린 거니까.”
꾸벅 졸던 박정수가 눈을 떴을 때에는 김희철이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막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황한 박정수가 서둘러 하차 벨을 누르려고 허둥거렸지만, 김희철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박정수가 어색하게 카 시트에 도로 기대앉았다. 겹쳐진 어깨와 나눠 꽂은 이어폰이 마주 닿았다.
“이상하죠.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아닌데.”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면서요. 괜한 오기 같은 거겠죠.”
“그건 맞는데, 욕심나는 대상이 자주 생기는 건 또 아니라서요. 기본적으로는, 관심이 없죠. 포기도 은근 빠르고.”
“…….”
“근데 요즘은 이상하게 자꾸 욕심이 나네.”
김희철이 픽 웃으며 버스 창문을 한 마디 열었다. 열린 틈으로 계절을 담뿍 머금은 습윤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 누나가 젝키를 되게 좋아하는데요. 젝스키스 알죠.”
“알죠.”
“누나가 그러더라고요. 최애는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받는 거라고.”
“네?”
“아, 그런 말 모르려나. 그냥…. 팬이 좋아하는 대상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별똥별이 착륙하듯 선택받는 거라는 거예요. 웃기죠. 나도 누나한테 그 얘기 들을 땐 멍청한 소리라고 생각했어.”
“뭐예요 그게.”
“나도 모르겠다는 거죠. 왜 당신이었는지.”
투박한 버스 소음과 한쪽 귀에만 꽂힌 라디오 소리 사이로 흘러드는 김희철의 음성은 나른하면서도 선명했다. 막 잠에서 깬 박정수에게는 기분 좋은 자장가처럼 들렸다. 곧 버스에서 내려야 할 텐데, 몸을 일으키고 싶지가 않았다.
“누구 말대로 뭐든 어려울 것 없이 꿈꾸고 이루던 사람이 헤매면서까지 왜… 하필이면 당신을 욕심내고 있는지.”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온 여름 바람에 앞머리가 갈대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정말로 당신이 뭐라고, 어깨를 내어주고 이어폰을 나눠 끼고 사람이 없는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 따위가 뭐라고 그런 걸 욕심내고 있는 걸까. 대화도 없이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버스에 앉아 도시 풍경을 스치는 쓸모없고 무용한 시간이 고작 어깨에 닿는 당신의 호흡만으로 유의미한 모든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창가에 비스듬히 기댄 김희철이 박정수를 빤히 바라봤다. 김희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박정수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나한테만 그래요?”
“응.”
“왜요, 내가 예뻐서?”
“예쁘죠. 이 정도 콩깍지면 뭘 해도 예쁠걸. 그래서 억울할 정도로.”
예쁘다고 했을 때는 안 믿더니. 김희철이 피식 웃었다. 예쁘다고 해도 들은 척 만 척 하거나 제 입으로 예쁘냐고 묻거나 억울할 정도로 예쁘게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한 김희철의 눈은 늘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담뿍 흘려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더라도 이제는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한결같이. 쑥스럽기는 해도 기분이 좋아진 박정수가 투덜거리듯 종알댔다. 콩깍지 때문 아니거든요….
“원래 예쁜 거예요.”
“맞아. 그래서 죽겠거든.”
박정수가 내려야 할 정류장이 다음이었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에 박정수의 손끝이 다시 하차 벨에 닿는다. 김희철의 손이 다시금 그 위로 덮였다. 그러나 조금 전처럼 끌어 내리지는 않고 대답을 기다리듯 그대로 멈춰 있었다.
“막차 끊길 때까지는 아직 시간 있는 것 같은데, 한 바퀴만 더 돌래요? 비도 오는데.”
질문에는 강요가 한 줌도 담기지 않았지만 어쩐지 벨 위에 놓인 손 끝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 탓인지, 기압이 낮게 깔린 날씨 탓인지.
“…비가 오니까요.”
목적지를 지난 버스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13
장마는 길고 지루했다. 두 사람은 종종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무료를 덜어냈다. 장마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니 촬영이 무기한 연기였다. 촬영 때문에 그동안 하던 아르바이트도 다 그만둔 박정수는 다시 백수가 되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심심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김희철의 연락을 무시하지 않고 만났다.
박정수의 생일에는 다시 '몽상'에서 파르페를 먹었다. 다행히 그날은 오전에 비가 그치고 해가 떠서 공기가 상쾌했다. 낮은 기압 때문에 울리는 소음도 덜 했고 눅눅한 냄새도 나지 않았다. 씨리얼이 촘촘히 묻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박정수는 첫 데이트가 망했을 때 애프터는 어떻게 신청해야 하냐고 말하던 김희철을 떠올리고 조금 웃었다. 결국은 이렇게 다시 함께 앉아 있게 되었다.
장마가 끝 무렵이라 비가 오락가락했다. 집에서 나올 때엔 비가 오지 않아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았는데 돌아갈 때쯤엔 다시 비가 제법 쏟아졌다. 다행히 박정수가 우산을 챙겨 나온 덕에 김희철을 데려다 주기로 했다. 그동안은 각자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었는데 하나의 우산을 공유하게 되니 불쑥 묘한 공기가 밀려들었다. 평범한 3단 우산은 성인 남자 두 명이 쓰기엔 많이 작았다. 서로의 어깨를 젖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저번보다 훨씬 더 가까이 붙어 서야 했다. 선배의 차를 얻어 탔을 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어깨가 어색하게 부딪쳤다. 서로를 의식하느라 걸음이 더뎌지는 탓에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10분이면 갈 거리가 훨씬 멀게 느껴졌다. 투둑투둑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무척 큰데도 곁에서 퍼지는 호흡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박정수는 괜히 우산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우리 좀…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지 않아요?"
문득 박정수가 물었다. 김희철은 말을 하느라 제게로 기울어진 우산을 박정수 쪽으로 세우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잖아요."
"몰입에 방해가 되면 곤란하니까요."
"그런 거 상관없다니까요. 연기는 연기고 일상은 일상이지."
"…사랑해보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당신한테는 그런 게 도움이 될 것 같았으니까요."
"맞아요. 덕분에 제법 괜찮은 연기를 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문제죠. 김희철 씨는 메소드 같은 건 싫다고 하셨지만 저는 그런 식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감정이 만들어지는 사람이니까요."
메소드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작품을 이유로 사람을 몰아가는 게 싫은 거라니까요…. 김희철이 머리를 헤집으며 변명처럼 말했지만 박정수의 눈은 조금 전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자그마한 스푼으로 파르페를 떠먹으며 가늘게 눈을 접어 웃던 얼굴이 먹먹한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원망해야 하는 사람이에요."
"……."
"좋은 감정에 묻혀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흐려지면 안 된다구요."
애증이니까. 박정수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해야 하는데 자꾸만 그 무게중심이 무너지려 한다고. 좋아하는 법을 찾으려다 미워하는 법을 잊어버릴 것만 같다고. 김희철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투둑투둑 우산 위로 낙하하는 빗소리만 길게 이어졌다.
"나 좋아해요?"
"네? 그게 무슨,"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흐려진다는 건, 그만큼 나를 좋아하게 됐다는 뜻 아닌가?"
"그게 아니라……."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던 박정수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맞아요. 처음보다 많이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감인지 악감인지 구분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해졌다. 김희철은 독특하고 제멋대로 굴 때가 많았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대화만 나누면서도 웃음이 났다.
"그러니까 이제 이런 건 그만 해요. 둘이서 밥 먹고 영화보고 꼭 친구처럼 지내는 일…. 다시 촬영을 시작하면 그럴 시간도 없겠지만요."
"왜요?"
"몰입에 방해가 되면 곤란하니까요…."
"그건 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연기보다는 아니라는 뜻인가?"
김희철이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우산 아래 응달에서 마주한 눈동자가 검고 짙었다. 검은 별. 참 김희철과 잘 어울리는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정수는 아니었다. 영화 속 역할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끝까지 노력해야 했다. 박정수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저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피하지 말고 제대로 얘기해줘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달라져요. 이건 내 문제이기도 하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박정수가 한숨을 쉬었다. 그냥…… 다 모르겠다. 사실 이렇게 선을 긋는 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대로 지내는 게 계속 익숙해지다가는 정말 위험해질 것 같단 예감만이 들었다. 그건 오래 홀로였던 사람만이 가지는 본능적인 자기 보호였다.
"그냥 저를 혼자이게 해주세요. 예전처럼."
"그럴 수는 없겠는데요."
"…어째서요?"
이제 질문을 하는 것은 박정수가 되었다. 대답을 하는 사람이 된 김희철은 조금 전의 박정수와는 달리 짙고 단단한 눈을 하고 있었다.
"박정수 씨 나 좋아한다면서요."
"그건, 그냥, 처음이랑 다르게 조금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죠….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
"나는, 나 좋다는 사람 그냥 놓칠 생각 없어요."
"그런 뜻이 아니라니ㄲ……."
"나도."
"……."
"좋아하니까요."
김희철의 검은 눈동자 안에 분명하게 담긴 것은 박정수였다. 다른 어떤 잔여물도 없는 오롯한 박정수 홀로. 그게 견딜 수 없게 가슴 떨리기도 하고, 버틸 수 없을 만큼 두렵기도 했다. 박정수가 숨이 멎었던 듯한 호흡을 되찾고 겨우 고개를 저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장난 아니에요."
"김희철 씨가 갑자기 저를 왜 좋아해요? 처음부터 그렇게 못마땅해 하셨으면서."
"글쎄 그게 아니었다니까요……."
막돼먹었던 스스로의 태도를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하지만. 김희철이 투덜거리듯 변명했으나 박정수는 더욱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면 더 안 되죠. 이런 개인적인 욕심 섞인 마음으로는 감정에 방해만 될 텐데."
"이제와 배우를 바꾸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예요?"
"필요하다면요."
그간 농담처럼 촬영을 엎자느니 여기서 관두자느니 하는 말들을 했지만 당연히 한 번도 진심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의 박정수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신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단 스스로의 감정을 이야기할 때에도 애매모호하기만 했던 사람이 더없이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정작 배우가 바뀌거나 촬영이 무산되면 가장 타격을 받을 사람이면서. 김희철이야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신인 배우로서의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지만 박정수는 이렇다 할 경력도 없이 어정쩡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번 영화가 박정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내세울 만한 작품이 될 거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더 간절한 쪽이 김희철이 아니라 박정수라는 건 분명했고.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요."
"쓸데없지 않아요."
그가 처음 만남의 빈도를 문제 삼아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다. 조금 전까지도 썰렁한 농담을 하며 허당 같이 어설프게 굴던 사람이 왜 갑자기 소 심줄 같은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김희철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으며 잠시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박정수 씨가 잘려도?"
그 말이 정곡이기는 했는지, 박정수의 어깨가 움찔한다. 그러나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두 개의 눈동자가 빤히 마주쳤다.
"……그래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죠."
그렇게 말하는 박정수의 눈에는 조금 전까지는 없던 감정이 한 꺼풀 더해진 것 같았지만 그는 진심을 숨기는 것이 꽤 능숙한 사람이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제가 김희철 씨를 오래 오래 원망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구요."
14
그렇게 헤어지고서 촬영이 재개되어 처음으로 다시 찍게 된 것이 하필 키스신이었다. 촬영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인사를 주고받을 틈도 없이 입술을 마주 대게 됐다.
"감독님. 저는 오른쪽 얼굴이 더 잘 나오는데요."
"저는 왼쪽이 나아요."
"잘 됐네. 어쩜 둘이 그렇게 딱 맞냐. 키스신 할 운명인 것처럼."
감독이 농담이랍시고 한 말에 아무도 웃지 않았다.
"컷. 너희 왜 또 다시 어색해졌니? 왜 내외야? 누가 보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인 줄 알겠다."
"…죄송해요. 선배."
"일부러 좀 친해지고 하라고 키스신 촬영도 뒤로 미뤄놨더니 왜 그래?"
"그러니까 그런 거 상관없다니까요."
"까불지 마. 너도 똑같이 엉망이야."
불손한 태도로 투덜거리던 김희철이 입을 뚝 다문다. 연기가 엉망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소한 감정에 휩쓸려 아마추어처럼 굴고 있다는 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촬영 쉬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
"…아니에요. 그냥."
"제대로 할 게요."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은 많지만 할 수 없는 사람들 같았다. 둘 다 한가락씩 하는 고집들이니 저렇게 나오는 이상 쉽사리 입을 열리가 없었다. 감독은 설명을 듣는 것을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집중들 좀 하자?"
그러나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는 건 단지 마지막 만남 때의 공방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분명 비 안 온댔는데!
젖은 머리를 털며 겨우 피해 들어간 곳은 옥색 공중전화 부스였다. 장마이기는 하나 드물게 비소식이 없던 날이었다. 두 사람 모두 우산을 챙겨 나오지 않아 갑작스럽게 쏟아진 소나기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식당에서 나와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박정수가 흰 티 위에 입고 있던 청 셔츠를 함께 뒤집어쓰고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소나기 같으니까 금방 멈추지 않을까요?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야 하나….
빗줄기가 굵게도 쏟아졌다. 타닥타닥 소리가 주변으로 튕겨져 나갔다. 두 사람은 젖은 옷을 털며 숨을 골랐다. 어차피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폭삭 젖어서 별로 소용은 없겠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조금 어색해서 몸을 움직였다. 닫힌 공중전화 부스 안에 있으니 외부와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뿌옇게 김이 오르기 시작한 유리 너머로 비를 피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빗소리만 들리는 공간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오래된 영화처럼 멀게 느껴졌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몸을 구겨 넣고 있기에 공중전화 부스는 너무 작았다. 물기를 털어내기 위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웅크린 어깨와 젖은 팔이 스쳤다. 나란히 선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심장이 뛰는 소리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이 내쉬는 숨으로 투명한 전화 부스가 뿌옇게 김이 서릴수록 공기가 어색해졌다.
-영화에서 보면, 이럴 때 꼭 키스 하던데.
김희철의 웃음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박정수는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부스 아래쪽의 깨진 틈만 발로 툭툭 찼다.
-…그런 보편적인 로맨스를 믿어요?
-믿냐는 건 무슨 뜻이에요?
-그냥.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요.
-박정수 씨는 도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지?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냉혈한 같은가?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냥 연애를 해도 본인이 가장 중요한 사람일 것 같아요. 그래서 남들 다 하는 유치한 짓은 안 할 것 같고. 뻔한 일은 싫어하고.
-설마요. 그런 걸 절대로 싫어하면 이 직업 못하겠죠.
김희철이 나란히 앞을 보고 있던 몸을 박정수 쪽으로 돌려 섰다. 박정수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앞만 보고 서 있었다. 여전히 참 어렵게 군다. 어느 틈으로 들어가야 효과적으로 그의 안을 볼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김희철은 그에게 흥미가 일었다. 제게 빤히 와 닿는 시선을 모르는 척 정면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의식이 되는지 눈을 굴리는 얼굴이 보였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할수록 티가 나는 얼굴을 조금 더 보고 싶었다. 김희철이 손을 뻗어 젖은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담담한 척 서있던 박정수가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는 바람에 좁은 전화 부스가 잠시 덜컹였다.
-연애라는 게 결국은 누구나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공유하게 만드는 일 아닌가요. 원래 로맨스는 가장 뻔하고 유치할수록 잘 먹히는 거예요.
-…….
-지금 우리처럼.
따뜻한 손이 귓가를 진득하게 만지작거렸다. 함께 비를 맞았는데도 손끝이 따스해서 금방 박정수의 귀에도 열이 오르게 했다. 그의 손이 닿아 있는 귀부터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박정수는 대답 대신 그를 마주보고 기대선 몸을 조금 더 물렸다. 그래봐야 좁은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더 멀어질 공간은 없었다. 깜박깜박 젖은 속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다. 내리깔고 있던 시선을 드니 당연하다는 듯 눈이 마주친다.
-키스 할까요?
귓가를 훑던 손이 목덜미로 밀려들었다. 박정수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벽에 등을 기댔지만 더 도망갈 곳은 없었다. 그림 같은 얼굴이 맞물리기 좋게 기울어진 채로 가까워진다. 눈을 깜박이면 속눈썹이 서로 스칠 것 같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분위기가 버거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는 대답처럼 전해질 것 같기도 했다. 눈도 깜박이지 못한 채로 마주보고 서 있으니 숨까지 멎는 것 같았다. 입술 사이에 손가락 한 마디의 틈도 남지 않은 채로 감지 않은 눈이 마주친다. 너무 가까워서 눈동자 속에 있는 제 얼굴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다른 어떤 잔여물도 없는 오롯한 박정수 홀로. 그게 견딜 수 없게 가슴 떨리기도 하고, 버틸 수 없을 만큼 두렵기도 했다. 비가 너무 가득 쏟아졌다. 전화 부스를 두드리는 빗소리가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쏟아지는 비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이 꼭 제 심장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박정수는 다리 옆으로 떨어져 있던 손을 말아 쥐었다. 차가운 전화 부스가 손에 닿는다. 긴장한 듯 침을 삼키니 마주한 얼굴이 각도를 달리 하며 조금 더 가까워졌다. 뒷목을 감싼 손가락이 대답을 기다리듯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바라보는 시선이 꼭 잡아먹을 듯 절절해서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다음에, 다음에요.
-상영 중인 영화에 다음이 어디 있어요? 그건 그냥 엔딩이지.
박정수가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김희철의 어깨를 밀어냈다. 김희철은 실망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순순히 손을 떼어내고 몸을 물렸다. 거리가 멀어지니 버겁던 호흡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 러닝타임이 끝나지 않은 영화라면 이어지는 내용이 있지 않겠어요?
-그럼 다음 내용을 끝까지 다 열어보기 전까지는 마음대로 엔딩 크레딧 올리지 않기로 약속하는 거예요? 엉망이었던 첫 데이트에도 애프터가 있었던 것처럼.
-…글쎄요. 그건 주연 배우 하기 나름이겠죠. 영화가 재미있으면 끝까지 보는 거고 지루하면 중간에 나가는 거고. 관객은 그런 선택을 할 뿐이잖아요.
-당신도 주연 배우거든? 또 은근슬쩍 한 걸음 물러나지.
김희철이 짜증내듯 말하며 숨을 고르기 위해 살짝 숙이고 있던 박정수의 등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박정수가 파르르 몸을 떨며 등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건 자꾸 꼬리를 자르고 타인의 이야기처럼 말하는 것에 대한 심술이었다. 커다란 손이 물러주지 않고 둥글게 말린 척추를 훑어 내렸다. 젖은 옷 사이를 파고들어 집요하게 어루만지니 소름이 돋았다. 예민한 허리가 간지럽게 건드려졌다. 좁은 공간에서 몸을 뒤채니 더운 숨이 더해졌다. 부드러운 손이 둥글게 말린 등을 한참 건드리고서야 목덜미를 스치고 빠져 나갔다. 어깨를 살짝 떨고서 몸을 바로 한 박정수는 비를 피하기 위해 함께 셔츠를 뒤집어 쓴 바람에 흰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젖은 옷이 몸을 따라 그대로 달라붙어 묘한 음영을 만들었다. 둥근 어깨와 가슴을 따라 투명하게 흘러내려 그 너머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다.
-이러고 있으면서 아무 것도 못하게 하는 거 존나 잔인하다.
김희철이 투덜거리며 박정수의 머리 위로 청 셔츠를 훽 뒤집어 씌웠다.
-그리고 이 정도는 좀 쉽게 대답해줘라. 나 지금 키스 까여서 좀 자존심 상한 상태거든요?
셔츠를 도로 입은 박정수가 부스 밖을 돌아봤다. 손바닥으로 눈앞을 닦아내니 투명해진 유리 너머로 비가 잦아들어 잠잠해진 바깥이 보였다. 무언가를 하기에 소나기는 역시 너무 짧지 않나……. 박정수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비가 멈췄나 봐요.
정말로 입술이 닿은 것은 아니었지만, 촬영장 밖에서 혀를 섞을 뻔한 일이 있었던 탓에 키스신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에 싸움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고. 그래도 어쨌거나 두 사람은 프로였기에 열심히 집중해서 촬영에 몰입했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감독도 나름 만족하고 오케이를 했다.
"컷. 이번에는 입술 닿는 거 각도별로 따보자."
실제 해성과 준서의 과거에 존재하는 장면은 김희철과 박정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입술이 닿을 뻔했지만 닿지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골목의 작은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묘한 분위기를 공유했다. 취했나? 취하지 않았나? 그런 말들이 변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이었다. 몸이 살짝 기울어진 채로 시선이 스쳤다. 닿을 듯 닿지 않던 입술은 결국 시선보다 먼저 멀어졌다. 그러나 현재의 두 사람이 기억하는 것은 입술이 완전히 겹쳐진 키스라서 두 가지 장면을 모두 촬영해야 했다.
자신의 기억과 경험, 보고 들은 것만을 믿으며 진실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외면하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박정수에게는 그게 충격적이었다. 기억이 진실과 다르다면 그걸 믿어도 되는 걸까. 그동안의 믿음에 불안의 균열이 생겼다. …왜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요. 촬영이 중단되기 전 미리 대본을 확인해보던 자리에서 박정수가 물었을 때 선배는 대답했다.
-인간의 기억만큼 불확실한 건 없는 법이니까.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그러면서도 또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지.
-…준서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그 기억을 이유로 해성을 원망해도 되는 걸까요.
-사람은 원래 그래. 모두가 불완전해. 그러니까 서로에게 기대,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살아가는 거겠지.
기억은 다르게 기록된다. 그 생각을 하면 모든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지곤 했다. 단지 영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현실을 생각해도 그랬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 두 사람이 모두 키스를 했었다고 기억하는 건…… 두 사람 다 그 시기의 기억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애써 외면하려 하지만 사실은 준서도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거고.
-…….
-그래서, 애증이잖아.
설명을 마치는 선배의 얼굴을 보며 박정수는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 같다.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고, 보고 싶은 대로 보고. 가장 지우고 싶은 기억을 잊어버리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절대 잊고 싶지 않았던 기억을 어느 순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도 한다. 기억이란 불완전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외면하던 진심보다 확실하기도 하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을 믿고 얼마만큼을 의심해야 하는 걸까.
박정수는 코끝에 닿아 오는 김희철에게 입술을 겹치며 소나기가 내리던 날의 공기를 떠올렸다. 다툼을 하고 헤어졌던 마지막 만남도 생각이 났다. 돌이켜 보니 흘러간 날들이 벌써 많았다. 지금은 선명한 기억들이 언젠가는 흐려지고 지워지고 또 덧씌워 수정될 것이다. 박정수는 떨어졌던 입술을 다시 겹치며 김희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날 우리의 순간은 어떻게 기억될까. 그리고 또 지금은. 아니, 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게 되긴 할까.
15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오래 자리를 지키던 세트들도 드디어 철수였다. 촬영장을 정리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선배와 포옹을 한 번 하고 돌아서니 정말로 끝이라는 게 느껴졌다. 아직 완전히 실감이 나진 않았지만 이제는 영화 속 배역들과 인사를 할 때였다.
묘한 눈으로 촬영장을 주욱 눈에 담은 박정수가 돌아섰다. 마지막이란 생각을 하니 괜한 감상적인 마음이 생겼다. 눈물이 좀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복잡미묘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제가 영화와 배역에 꽤나 애정을 가지고 있었구나 느끼게 됐다. 그럴만한 역할을 맡아본 적이 없어 처음 느끼는 기분이었다. 생각에 잠겨 걸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거의 도착했을 때, 불쑥 어깨가 붙잡혔다. 의아해하며 돌아보니 앞에 서있는 것은 김희철이었다.
"걸음이 왜 이렇게 빨라요? 저 뒤에서부터 불렀는데 돌아보지도 않고."
"…생각을 좀 하느라, 몰랐어요."
뛰어 왔는지 무릎을 짚고 숨을 고르면서 말한다.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 혼자만의 세계로 멀어져 가고 있던 박정수는 한순간에 현실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언젠가 당신이 떠내려가지 않게 붙잡아주고 함께 버티겠다던 김희철의 말이 생각났다. 박정수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자 숨을 고른 김희철이 허리를 피며 말했다.
"우리, 이제 다시 못 보는 건가."
"…그건 아니겠죠. 뒤풀이도 할 거고 영화 홍보 때문에 만날 일도 있을 거고,"
"그 말이 아니잖아요."
"……."
"준서가 해성이를 싫어한다고, 박정수 씨도 정말로 김희철을 싫어할 거예요?"
분명 잘 지내던 날들도 있었다. 사소한 농담에 웃음 짓고 가벼운 타박을 하며 편안함이 익숙해졌던 날들. 그러나 그 시간의 마지막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며 물러섰던 박정수였다. 그 이후로는 촬영장에서 일적으로 만난 게 전부였다. 싫어한다, 라. 그보다는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게 맞는 말일 것 같다.
"나는 그쪽이랑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러나 김희철은 별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에 박정수를 가득 담고서 말했다. 문득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가 해성인지 희철인지 헷갈렸다. 박정수를 바라보는 김희철이 준서를 바라보는 해성의 눈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김희철은 메소드를 싫어한다고 했고, 영화는 분명 끝이 났는데.
"…왜요?"
"뭐가 왜에요?"
"저랑 왜 친해지고 싶으신 건데요? 저 못마땅해 하셨잖아요."
박정수가 눈가를 찌푸리고서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촬영 초반부터 마음고생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제와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개인적인 시간을 공유하고 감정을 나누게 되기도 했지만, 그건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영화가 끝나면 이어질 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박정수가 먼저 선을 긋지 않았더라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게 당연했다. 호감과 악감을 떠나, 정말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 너머 시간의 일을 묻는 김희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제가 그런 눈치도 없을 정도로 멍청해 보였나요? 아니면 그래도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아부 떨 것처럼 가오가 없어 보였나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뭐가 됐든 별로 기분 좋지 않네요. 저는 김희철 씨랑 친해지고 싶은 마음 조금도 없어요. 김희철 씨가 보기엔 제 실력이 발끝에도 못 미칠 한심한 수준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제가 가진 거라곤 자존심 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그게 그렇게나 중요하네요.“
"……."
"죄송하지만… 아니다. 죄송할 것도 없죠 뭐. 말씀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박정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영화가 끝났듯 그들의 관계도 끝이었다. 그러나 돌아선 등 뒤로 외면할 수 없는 진심 같은 목소리가 닿았다.
"사과할게요."
버릇처럼 손목을 잡아 돌려 세우지도 않은 채로 등 뒤로 목소리만 전해진다. 차라리 손목을 붙잡고 어깨를 돌렸으면 뿌리치고 멀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목소리로 말을 하며 제게 손끝 하나 대지 않는 남자의 말이 어느 때보다 진심처럼 느껴졌다. 박정수는 다시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심했어요. 솔직히 기대를 많이 했는데… 생각이랑 달라서 실망했던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초반에 너무 몰아 붙였어요. 그렇게 하면 내가 봤던 얼굴이 나올 것 같아서. 근데 너무 했죠. 변명할 것도 없는 내 잘못이에요."
근데 솔직히… 내가 그렇게 가까워지고 싶단 티를 냈는데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좀 너무하다. 김희철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꼭 당신이랑 이 영화를 하고 싶었거든."
"……."
"농담처럼 촬영 엎자는 말도 하고, 당신은 쓸데없는 감정이 생긴다면 배우를 바꿔야 한다는 말까지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당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감독님한테도 그렇게 말씀드렸고."
이어지는 김희철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고 있던 박정수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쪽이 저를… 추천했다고요? 어떻게… 아니, 도대체 왜요?"
"추천이라고 하기는 좀 거창하죠. 내가 뭐라고 그럴 만한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감독님한테 좀 졸랐어요. 이 사람이랑 같이 하고 싶다고."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는 설명도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정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말도 안 돼. 당신은 나를 한심하고 어설픈 존재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잖아. 그래서 내가 미워해야 했던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당신 연기를 처음 봤을 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사람이라서, 이 사람이랑 같이 하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박정수는 정말로, 김희철이 제게 하는 말들이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연기가 좋았다던 말도, 당신의 재능이 꽤 괜찮다는 말도, 당신과 가까워지고 싶고 당신이 좋다는 말들까지도. 그저 가벼운 변덕으로 아무렇게나 던져보는 말들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박정수가 믿었던 것은 가장 처음, 그의 재능과 노력을 짓밟던 말뿐이었다. 그 말이 짙게 남아 다른 이야기들은 텅 빈 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계속 진짜라는 김희철의 말에도 아무렇게나 흘려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그는 누구보다도 진심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믿을 수밖에 없을 만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직업은 타인의 인정을 받는 일이 중요했다. 김희철은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쯤이야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곤 했지만 박정수는 그게 잘 안 됐다. 내가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했다. 그만큼 더 이를 악 물고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인정을 받을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수십 번의 오디션은 인정이 아니라 평가를 받는 자리일 뿐이었다. 번번이 마주한 낙방은 낙제에 가까운 평가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든 해내고 싶어 버티고 있었지만, 사실 버거울 때가 많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지는 비에 떠내려가 세상에서 잊혀질 것 같은 두려움이 수시로 그를 집어 삼켰다. 그런 박정수에게 김희철은 말했다.
“욕심 난다고 했잖아요.”
“…….”
"그래서 그랬어요. 재수 없게 몰아붙인 것도, 가까워지고 싶다고 답지 않게 간지럽게 군 것도."
처음으로 인정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김희철에게서. 김희철은 빗속에 흘러 내려가던 박정수를 한순간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그는 분명 여름비처럼 머리 위를 적시고 있었지만, 동시에 떠내려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어떻게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는 일인지….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사과도 하고 고백도 했으니 이제 믿어 줄래요?"
진심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시선이 박정수를 스쳤다. 아주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남았다. 멀리 마주보고 선 김희철의 시선이 심장을 스치는 순간, 돌멩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서 연한 싹이 반짝 움텄다. 별이 자라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당신 연기를 먼저 사랑했거든."
마른 흙먼지가 일며 버스가 다가왔으나 박정수는 자리에서 멀어질 수도 어떤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박정수의 시야에는 여전히 김희철만이 서있었다. 아마 버스를 놓치게 될 것 같았다.
16
-뭐 보세요?
-아아, 나머지 주연 자리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배우들 자료 좀 보느라.
-…이 사람도 후보로 생각하시는 거예요?
-나는 얘가 꼭 해줬으면 좋겠는데…. 본인이 별 생각이 없어 보이네. 일단 말은 해봤는데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감독은 남은 주연 자리 배우를 정하기 위해 후보들의 프로필과 이전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사진이 붙은 종이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자료들을 훑어보던 김희철의 눈이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화면에 멈췄다.
-…이 사람으로 해요.
김희철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저 다른 사람은 안 될 것 같아요 감독님.
-이 사람이랑 할래요, 애증.
분명히 어설프고 부족한 구석이 많은 연기였다. 발음이 좋아 대사 전달력이 괜찮은 편이기는 했지만 큰 장점이 될 부분은 아니었다. 목에 힘이 들어가서 감정이 제대로 표현되질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이 갔다. 그 분위기와 살짝 어긋난 시선에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박정수는 별 같았다. 온 힘을 다해서 빛을 내고 있는. 막상 촬영을 시작하고 본 박정수는 나머지 단점만 남은 부족한 연기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고 싶다는 이기심에 심할 정도로 자극하니 오기가 생겼는지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정말로 점점 더 나아진 모습으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역할 그 자체인 얼굴로 건조하고 쓸쓸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사람이라서, 이 사람이랑 같이 하면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을수록 더 많은 것들이 알고 싶어졌다. 캐릭터가 아닌 박정수를. 배우 박정수가 아닌 그냥 그 사람 자체를. 김희철이 알고 싶었던 것은 결국 박정수의 연기가 아니라 박정수라는 사람이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들이 생겨나는 밤이었다.
17
술자리는 소란스러웠다. 촬영이 끝난 후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투자도 꽤 붙고 배우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 나름 기대를 받고 있는 영화라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뒤풀이 장소 앞에 기자들도 몇 명 모여 있었다. 배우들이 하나둘 나타날 때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박정수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 낯설어서 어색하게 그 앞을 지나 가게 구석에 자리 잡았다.
"우리 주연 배우님이 가운데 앉아야지~~"
"선배, 저는 술도 못 마시는데 그냥 여기 있을 게요…. 다른 분들이랑 재밌게 노세요."
이미 술이 알딸딸하게 취한 선배가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어색하게 웃으며 거절하자 관심은 금세 멀어졌다. 박정수는 느릿하게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술을 몇 모금 넘겼다. 멀찍이 앉은 김희철과 시선이 몇 번 스쳤으나 박정수가 먼저 고개를 돌려 피했다.
"어우…. 한꺼번에 달려들어서 술을 얼마나 먹이는 거야…."
한참 뒤 바람을 쐬기 위해 나온 김희철은 가게 앞 자판기 아래에 웅크리고 앉은 등을 발견했다. 술기운이 조금 오르는지 모아 접은 무릎 위에 뺨을 기대고 앉은 채였다. 둥근 손끝이 빈 바닥을 툭 툭 건드리고 있었다. 김희철의 시선이 말린 등에 흘긋 닿았다 멀어졌다.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돌아보지도 않는다. 김희철은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을 굴려 넣었다. 조금 고민하다 버튼을 누르니 식혜가 떨어져 나왔다.
"우리 오랜만에 만난 거 아닌가. 눈도 안 마주치네요.”
"아이스크림이 좋은데…."
"술 많이 마셨어요?"
쪼그리고 앉은 옆에 가까이 앉으며 식혜 캔을 건네니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보이면서도 일단 받아 든다.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알딸딸한 술기운에 젖어 있었다.
"왜 자꾸 저한테 뭘 주세요?"
"제가요?"
"모르고 있었던 거 보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나……."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요. 내가 박정수 씨한테 그랬다고?"
"네에. 처음에는 박카스, 그 다음에는 오렌지 주스, 그리고 지금은 또 식혜. 자꾸 뭘 하나씩 주잖아요. 근데 맨날 내가 안 좋아하는 것만 준다…. 진짜 센스 없네."
박정수가 투덜거리며 식혜 캔에 뺨을 댔다. 술기운이 오른 피부에 차가운 온도가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김희철이 무릎 위로 기울어진 박정수의 얼굴에 맞춰 시선을 기울이며 말했다.
"내가 그랬는줄 나도 몰랐네."
"처음부터 계속 그랬으면서 왜 자기가 그런 줄도 몰라요? 바본가 봐."
"그러게요. 마음을 줄 수는 없으니까 다른 거라도 준 건가."
훅 들어온 간지러운 말에 박정수가 얼굴을 확 찌푸린다. 그런 말 좀 하지 말아요……. 투덜거리니 김희철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내가 뭘요?
"그건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박카스, 주스, 식혜는 전부 박정수 씨가 안 좋아하는 거라면서요. 근데 내 마음은 좀 마음에 드나 궁금해서."
"아 진짜……."
"아니라고 안 하네? 그걸 제일 좋아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른 거 다 제끼고 내 마음이나 줄 걸 그랬다. 그치."
"…그게 제일 마음에 안 들거든요?"
얼굴을 찌푸리고 투덜거리던 박정수가 불쑥 일어났다. 그리고는 놀리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있던 김희철을 두고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김희철이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우고 얼른 뒤를 쫓았다.
"어디 가요?"
"…따라 오지 마세요."
생각보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파다닥 뛰는 걸음이 제법 흔들렸다. 그러면서 쫓아오지 말라고 해도 그냥 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뒤풀이가 시작될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부슬부슬 공기를 적시고 있었다. 미약하게 느껴지는 수준의 안개비였지만 오래 맞고 있으면 제법 젖어들 정도는 됐다. 김희철은 휘청이는 박정수의 팔을 붙잡고 나란히 따라 걸었다. 어차피 우산은 없었지만 취한 사람을 빗길에 혼자 보내는 것은 불안했다.
"비도 오는데 어딜 가려고."
"아이스크림 사러 갈 거예요."
술을 마신 박정수는 조금 칭얼거리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평소보다 훨씬 발음을 웅얼거리듯 뭉개고 말끝을 흐렸다. 그게 신기해서 자꾸만 얼굴을 빤히 쳐다보게 됐다. 그때마다 박정수는 부담스럽게 쳐다보지 말라며 김희철의 눈을 가렸다. 김희철은 괜한 장난기가 돌아 박정수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더 진득하게 시선을 흘렸다. 박정수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촬영이 한창일 때보다 선선해진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두 사람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함께 맞으며 나란히 걸었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의 소음이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적당한 음량의 소리들이 영화의 배경 음악처럼 깔렸다. 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슈퍼까지 걸어갔다. 종종 박정수가 휘청일 때마다 김희철의 손가락이 팔뚝을 힘주어 붙잡았다.
박정수는 슈퍼를 나오자마자 아이스크림 봉지를 까서 입에 물었다. 성격도 급하네. 빗속에서 먹다가는 아이스크림보다 비를 더 많이 먹겠다. 김희철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가게들 사이에 자리한 계단을 가리켰다. 저기에서 마저 먹고 가요.
"김희철 씨는 제가 그렇게 싫으세요?"
"좋아한다니까요."
"거짓말. 근데 왜 저를 그렇게… 괴롭히고… 곤란하게 하고……."
"곤란한 건 지금 나인 것 같은데요."
좁은 계단에 앉자마자 박정수가 불만을 쏟아냈다. 음료수도 맨날 맛없는 것만 줘. 그럴 거면 주지 말지. 불만의 내용은 점점 유치하고 사소한 것까지 향해갔다. 그동안 김희철에게 쌓여 있던 마음들을 다 토로하기라도 할 셈인가보다. 김희철은 그냥 어이없는 말들을 들어주며 그를 쳐다봤다. 박정수는 한참 불만을 늘어놓으면서도 중간중간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고 우물거렸다. 문제는 말을 하느라 공기에 노출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스크림이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투덜거리듯 말하는 동안에도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목까지 타고 흘렀다. 박정수는 그동안 쌓인 것들을 얘기하느라 끈적하게 손이 젖어드는 것도 미처 모르는 듯했다.
"박정수 씨 나 싫어해요?"
"싫은 건 아닌데."
"내가 지금 키스하면 싫을 것 같아요?"
"그건… 생각 안 해봤는데."
박정수가 고개를 저을 때마다 옅은 바닐라 향이 빗속으로 퍼졌다. 술에 취한 얼굴이 느리게 눈을 깜박인다. 비를 맞아 젖은 속눈썹이 움직일 때마다 가게의 조명이 반사되어 빛이 물들었다. 둥글게 움직이는 뺨으로 여러 빛이 스쳤다. 하얀 냄새가 났다. 말갛고, 보송하고, 어딘가 손대고 싶어지는 냄새. 김희철이 허탈하게 웃었다. 무방비하게 사람 미치게 하는 짓을 참 잘 한다.
"그럼 생각해봐요. 지금부터 키스할 거니까."
젖은 입술이 겹쳐졌다. 종알거리며 불만을 토해내던 혀가 금세 엉켰다. 갑자기 다가온 입술에 놀랐는지 눈을 찡긋거리던 박정수가 이내 잠잠히 혀를 움직였다. 말랑하게 입 안을 훑는 혀가 기분 좋았다. 박정수는 눈을 깜박이며 김희철의 얼굴을 쳐다봤다. 커다란 손이 귓가를 만지작거리고 뺨을 문질렀다. 약한 비를 맞아 체온이 떨어졌던 몸에 온기가 닿으니 기분이 좋았다. 박정수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입술을 떼어낸 김희철이 뒷목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싫어요?"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골목의 작은 가게 앞에 쪼그리고 앉아 둘 뿐인 묘한 분위기를 공유했다. 얼마 전에 촬영한 영화 속 장면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촬영할 때에 입술을 맞댄 것은 준서와 해성이었으나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박정수와 김희철이었다. 큰 손이 대답을 기다리듯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 쓸어내린다. 박정수가 흐려졌던 눈을 깜박였다. 지붕 아래로 줄지어 매달린 꼬마 전구 몇 개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취했나? 취하지 않았나? 그런 말들이 변명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살짝 기울어진 채로 시선이 스쳤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순간도 나중에는 다르게 기억될 지도 모른다. 박정수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끈적거려요."
피식 웃은 김희철이 슈퍼에서 아이스크림과 함께 산 생수로 손을 씻겨 주었다. 박정수가 잠잠히 시선을 내리깔고 자신의 손을 씻겨 내는 큰 손을 눈에 담았다. 집중한 정수리가 문득 애틋하게 느껴졌다. 끈적한 손바닥을 조물조물 문지르니 불쾌한 느낌이 금방 사라졌다. 생수 병을 멀찍이 밀어 놓은 김희철이 다시 시선을 맞췄다. 됐죠? 그렇게 말하며 깨끗해진 손을 자신의 뒷머리에 끌어다 놓았다.
"눈, 감아요. 이번에는 제대로 할 거니까."
다시 입술이 깊히 맞물렸다. 김희철은 조금 전의 입맞춤이 장난이었다는 듯 깊숙하게 혀를 밀어 넣고 박정수의 혀를 끌어당겨 빨았다. 뺨을 감싼 손바닥이 감긴 눈가를 어루만진다. 감으라니까 또 얌전히 감고서 제게 기울어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간지러운 웃음이 새어 나오자 눈을 뜨고 얼굴을 확인한 박정수가 눈썹을 찡그리며 어깨를 툭 쳤다. 김희철은 그 얼굴을 보다가 한 박자 늦게 눈을 감으며 못마땅하게 떨어져 나가려는 뒷목을 다시 끌어 당겼다. 유려한 손가락이 발개진 귓가며 굳은 뒷목을 집요하게 쓸어 내렸다. 함께 비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기분 좋은 온도가 몸 곳곳을 매만졌다. 혀가 섞이는 질척한 소리가 빗소리 사이로 섞여 들었다. 사람들의 소음이 점점 멀어졌다. 머리 위에서 내내 깜박거리던 전구가 팟 하고 완전하게 불이 들어왔다.
"…아이스크림은 다 녹아 버렸네."
"다시 사줄까요?"
"이제 됐어요."
"왜, 어차피 슈퍼도 바로 코앞인데. 나 그 정도 능력 돼요."
"아이스크림 사줘놓고 또 그러려고 그러죠."
박정수는 이상한 기분이 들게 말을 하는 구석이 있었다. 싫은 것 같냐고 물었을 때 딴소리나 해놓고 입을 벌려 주어서 이어진 키스였는데 괜히 김희철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김희철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누가 보면 내가 어린 애 사탕으로 꼬셔서 나쁜 짓 한 사람인 줄 알겠네."
두 사람은 아까보다 좀 더 잦아든 빗속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손등이 스칠 정도의 거리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문득 언젠가 함께 비를 맞았던 날들이 떠올랐다. 우산 위를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더 가까이 걸어야 했던 날들. 코끝이 스칠 거리에서 결국 겹쳐지지 못했던 입술. 여름의 빗소리는 잦아들었는데 나란히 선 거리는 더 가까워져 있었다.
"이게 그때 미뤄둔 엔딩 장면이에요?"
"아뇨 이건……."
"……."
"우리, 영화의 시작 아닐까요."
우리, 라. 술기운이 오른 탓인지 평소와는 다른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을 속닥거리는 게 퍽 애틋하게 느껴졌다. 김희철이 어깨가 닿을 거리에 선 얼굴을 돌아본다.
"오프닝 장면부터 키스라, 엄청 내 스타일인 영화네."
촬영은 끝났지만 우리 영화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사실이 무척 설렜다. 정해진 대본이 없는 이야기에서는 두 사람이 주연 배우이자 감독이자 작가였다. 다음 장면에 무슨 내용을 담을 지는 오직 두 사람만이 결정할 수 있었다.
"들어가 봐야겠네요. 주연 배우가 둘 다 없어졌으니 다들 찾고 있겠네. 박정수 씨는 조금 더 있다 들어올래요?"
다들 취해서 정신이 없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다. 둘 중 한 사람은 술자리의 소란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김희철이 박정수의 어깨를 한 번 잡았다가 놓으며 말했다.
"…가지 마요."
처음 앉아있던 자리에 다시 쪼그리고 앉은 박정수가 김희철을 붙잡았다. 소매를 붙잡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 웅크린 등으로 동그랗게 올려다본다. 김희철은 그 얼굴을 내려다 봤다.
"옆에 있어 주세요."
분명 울고 있지 않은데 젖은 눈. 오래오래 비를 맞고 서있던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나랑…… 같이 있어요. 계속 계속."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떠내려가지 않게, 사라지지 않게 붙잡아 주겠다고 했다. 언젠가 비가 멈추고 해가 뜰 때까지 같이 버텨 보자는 말을 했다. 울고 있지 않은데도 젖어 있는 박정수의 눈은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들게 했다. 당신의 젖어 있는 부분을 아주 조금쯤은 말려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진짜?"
"진짜."
김희철이 다리를 접어 그 앞에 마주보고 앉았다. 무릎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렇게 바라볼 때면 박정수의 눈 속에 비가 물러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가까이에서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졌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요. 난 분명 놓아줬는데 박정수 씨가 나 붙잡은 거니까."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죠."
박정수가 눈가를 찡그리고서 투정부리듯 잡은 옷자락을 조금 흔들었다.
"뭐가요?"
김희철은 얄궂게 모르는 척을 했다.
"나 좋아하면서…… 내 탓인 척. 내 핑계 대는 거."
"티 나요?"
"엄청요."
"그치만 나도 최후의 변명거리 정도는 있어야죠."
다정한 손끝이 찡그린 눈가를 어루만진다. 구김을 펴듯 꾹꾹 매만지니 표정을 고친 박정수가 훨씬 말랑해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변명이요?"
"응. 박정수 씨야말로 나중에 내 탓 하면 어떡해요? 나 때문에 사랑 같은 거 하게 되어 버렸다고."
"사랑……."
박정수는 그 말이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 안에 굴려 보았다. 왠지 너무 오랜만에 듣는 기분이었다. 현실에 묻혀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단어였다.
"……안 할 게요. 그런 거."
사랑을 안 하겠다는 말인지 당신을 탓하지 않겠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김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물으니 젖은 눈이 다시 올려다본다. 시선이 마주치니 입술이 닿아 있던 조금 전의 감각이 떠올랐다.
"다시 키스 해주세요."
함께 소나기를 맞을까요 우리. 쏟아지는 빗속에 함께 서 있을까요. 떠내려가지 않게 서로를 꼭 붙잡고 내리는 비를 함께 맞아요. 서로에게 기대어 아직 남아 있는 온기를 나눠요. 그러면 아마, 당신과 키스할 때의 기분이 들지 않을까요. 이 비가 당신이 되어 우리를 끌어안아 주지 않을까요.
"더 오래 오래."
꼭 사랑 받고 있는 것처럼.
18
-삐삐 해요.
-…싫어요.
-같이 있어 달라면서요.
-술 취해서 한 말이잖아요……. 못 들은 걸로 해줘요.
-이미 들은 말을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하나?
-챙피하단 말이에요.
-뽀뽀 한 번 해주면 잊어버릴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아이 진짜.
툴툴거리는 손목을 붙잡아 살랑살랑 흔들며 손장난을 치던 김희철이 피식 웃는다.
-좋아요. 많이 봐줬다. 그럼 비가 오면, 그때는 정말로 먼저 연락해요.
-…장마는 끝났는데요?
삐삐를 남기라고 할 때는 튕기더니, 혹시라도 비 오는 날이 없을까봐 걱정되는지 눈을 굴린다. 그래서 정말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이가 될까봐. 곁에 남지 않을까봐. 그러나 김희철은 실패해 본 적 없는 사람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맑게 웃었다.
-비는 언제든 오는 법이라니까요.
역시 박정수에게 가장 알 수 없는 존재는 김희철이었다. 금방이라도 삼켜 버릴 듯 무거운 비구름이었다가, 청량한 여름 하늘이었다가, 결국은 전부가 되고 마는.
19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자유 여행. 지금껏 여행 같은 건 사치라고 생각해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아마 앞으로는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이 어려워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정말로 스타가 될 테니까. 성공할 거니까.
그렇게 거창한 마음을 먹고 시작한 여행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인 낯선 풍경에 이미 그때부터 침착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헤맸다. 박정수는 종이 지도를 펼쳐 들고 사람들에게 휩쓸리며 부딪치지 않기 위해 어깨를 웅크려야 했다. 지도는 읽기 어려웠고, 낯선 골목은 다 거기가 거기 같았다. 쓰고 온 안경까지 부러져서 시야가 흐려졌다. 아침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어서 배도 고팠다. 그렇지만 적당한 식당을 찾아 들어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혼자 타지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상황이 계속 꼬이기만 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여행 같은 건 괜히 하겠다고 나섰다. 집에나 가고 싶었다. 안 하던 짓 같은 건 하지 말고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기나 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여기서 뭐 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정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흐릿한 시야에 '하늘상회' 라고 적힌 구멍가게 간판이 그제야 보였다. 파란색 페인트 문 옆에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있었다. 칠이 벗겨진 낡은 철문 앞에 빨간 슬리퍼가 서있었다. 문을 열고 그 앞에 나타난 건, 낯선 타지에서 보니 더 반가운 얼굴이었다.
"김희철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이거 꿈인가?"
"내 꿈 꾼 적 있어요? 설레게."
김희철이 다리를 접어 앉으며 등을 웅크린 박정수와 눈을 맞췄다.
"나는 우리 엄마 보러 왔는데."
"아…."
"여기 살고 계시거든요. 나도 어릴 때 살던 동네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그 역시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자랐다고, 대충 설명을 했다. 박정수는 그 말들을 들으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당신이 나를 찾아 주었다고, 그래서 흘러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당신이 나를 찾은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찾아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슬리퍼에 츄리닝을 걸치고도 이렇게나 별을 닮은 당신을.
"뭐야, 왜, 왜 울어…."
김희철이 당황하며 조금씩 젖어드는 얼굴을 양 손으로 감싸 쥐고 들여다봤다.
"나 사람 우는 거에 약하단 말이야. 달랠 줄을 몰라서."
"……."
"나 때문에 울어요?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아닌데…. 여기까지 오다가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근데 진짜로 도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흐으…."
"음료수라도 뽑아다 줄까요? 아니… 아이스크림?"
김희철은 횡설수설했다. 그가 그렇게 당황하는 것을 처음 봐서 울던 와중에 웃음이 좀 날 것 같았다. 여전히 제게 자꾸 뭘 주려고 하는 것도 웃겼다.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배고파요."
"…네?"
"지도는 하나도 모르겠고… 길은 다 똑같은 것 같고, 낯선 사람들한테 길 물어보는 것도 무섭고… 안경까지 부러졌어요. 다 짜증나."
"고생했네. 내가 어떻게 달래줄까요?"
김희철은 박정수의 말도 안 되는 투정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박정수는 자기가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한참 떠들었다. 잔뜩 쏟아내고 나니 서러웠던 마음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손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 닦아낸 눈가가 붉어졌다.
"달랠 필요 없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손만 잡아 줄래요? 그거면 될 것 같은데."
김희철은 어색하게 손을 내주었다. 박정수는 그 손을 붙잡고 남은 울음을 흘렸다. 아무런 위로도 없었지만 훨씬 나아졌다. 눈물은 계속 흘렀지만 적어도 외롭지는 않았다.
"좀 나아요?"
"몰라요."
"아직도 서러운 것 같으면 키스 해주게."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여전히 박정수는 김희철에게 눈을 흘겼지만 잡은 손을 놓지는 않았다. 씨익 웃은 김희철이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감싸 쥐고 끌어당겨 입술을 겹쳤다. 젖은 뺨이 문질러졌다. 무어라 불만을 뱉으려던 입술은 뜨겁게 얽히는 혀에 삼켜졌다. 여름비처럼 피할 수 없게 쏟아지는 사람. 밀물처럼 덮쳐들면서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게 단단히 붙잡아 주는 사람. 그 여름의 김희철은 그렇게 병명을 모른 채 앓게 되는 이상한 열병 같은 사람이었다. 비를 맞는 기분이 들었고, 사랑을 닮은 기분이 들었다. 성급하게 다가온 입술은 우습게도 다정하게 혀를 끌어 당겼다. 농담처럼 말했으면서 정말로 서러움이 잦아들도록 입안을 건드렸다. 피할 수 없게, 마주 붙잡고 싶어지게. 결국 박정수도 눈을 내리감았다.
“왜 연락 안 했어요?”
“…비가 안 왔잖아요.”
“비 오는 날 기다렸어요? 나돈데.”
“…기다렸다고는 안 했거든요.”
“비가 안 왔다는 걸 기억하고 있잖아.”
“…….”
“비 대신 내가 왔으니까 이제 연락해도 돼요.”
예고 없이 쏟아지는 그 여름의 별 같았던 순간.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 눈앞에 나타나준 당신이 꼭 간절히 바라던 별똥별 같았다고, 문득 눈앞이 환해져서 마치 한낮에 쏟아지는 별 같았다고.
“알았지?”
“…응.”
그 말을 할 수가 없어 눈앞에 다가온 흰 손을 붙잡고 다만 하염없이 명멸했다.
20
여름 빛처럼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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